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아아악 이건 말이 안 돼!!!”
희망법의 새로운 사무실, 슬리퍼 한쪽이 수줍게 끼어 있는 현관문을 열면 사람 수의 딱 두 배 정도 되는 신발들이 정겹게 엉켜 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있는 직사각형의 방. 법서는 물론 인권과 관련한 책이나 자료집이 빼곡히 꽂혀있는 책장으로 둘러싸인, 가운데는 커다랗고 너른 책상이 하나 놓여있어 회의용으로도, 점심식사용으로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이 공간에서 지난 한 달간 울려 퍼졌던 외침(?)이 하나 있다.
현정, 수연, 지은, 종국. 희망법의 세 번째 법학전문대학원 실무수습생인 우리는 이 정겨운 공간을 한 달 동안 차지하면서 참 많이도 열을 냈다(물론 중의적 의미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적 편견이 전제된 것이 분명한 성별정정 기각결정이나 병역면제 취소처분, 장애인의 시험 응시나 놀이기구 이용 등에 대해 근거 없는 제한을 가하는 차별적인 기업논리, 사전 신고범위를 아주 조금 벗어난 것에 대해 여지없이 집시법 위반과 일반교통방해죄를 들이미는 그 얄팍한 공권력까지. 희망법 실무수습 기간 동안 우리가 만난 사건들은, 그 이야기의 생생함에 비례해 오히려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첫 2주 동안 우리는-특히 나는-곧잘 화를 냈고, 끊임없이 ‘이건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말이 안 됨’을 정확히 어떻게 글로 설명해 낼 것인지, 또한 재판부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떤 법적 근거를 들고 어떤 판례를 인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이 분노만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치열한 노력들이 계속 있어왔음에도 사회의 차별은 여전히 공고하다는 뼈아픈 현실감각을 되찾자, 나머지 2주 동안은 조금은 차분해진 상태로, 하지만 더욱 열심히 요긴할 근거를 찾고 논리를 구성해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들은 자꾸만 부정하지만
의욕에 앞서 불불거리기만 했던 내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 무사히 과제 서면들을 제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시 희망법 구성원 분들의 영향이 컸다. 사실 처음에는 희망법 변호사님들과 가까이에서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짝사랑하는 선배는 멀리서 바라봐야 가장 멋있는 법이고, 좋아하는 작가는 트위터 같은 건 안했으면 하는 바람이니까.
하지만 희망법의 실체는 역시 멋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꾸만 부정한다.) 구성원들이 실제로 일하는 과정, 작성한 서면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 정말 값졌다. 밤을 꼬박 새울정도로 바쁘면서도, 혼자 뚝딱 해버리면 금방 끝날 일을 실무수습생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시고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시려는 그 마음에 감동했다. 실제 사건들은, 특히 희망법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특별법들을 활용해야 할 일이 많았고,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에 맞는 법논리를 구성하는 작업은 학교 시험 답안지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머리를 쥐어 짜 내어 밤새 완성한 과제가 변호사님의 실제 서면에 조금이라도 반영되는 것이 기뻤고, 한편으로는 실제 서면의 완성도에 감탄하며 배울 점들을 찾았다.
또한 각 변호사님들이 담당하고 있는 분야와 관련하여 해 주시는 교육프로그램은 희망법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특전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마지막 교육이었던 가람님의 교육에서는 실무수습생들이 감동의 눈물을 터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덧붙여 희망법 실무수습의 장점을 말하자면 실무수습 오리엔테이션날부터 대체적인 일정을 미리 알려주시고, 다양한 외부활동 일정을 매 주 공지하여 참석하고자 하는 실무수습생을 데려가 주신다는 것이다. 덕분에 SOGI법연구모임 회의, 군관련성소수자네트워크 회의, 성폭력 상담원 교육, 재판 등에 참관할 수 있었고, 병무청 앞에서의 규탄기자회견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뿐 아니라 다른 수습동기들은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민변 여성위, 직장내 괴롭힘 관련 회의 등에도 활발히 참석했다. 단지 빈 책상을 하나 내어주는 것이 아닌 진짜 ‘실무수습’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아현동 육교 시민'으로 마무리한 실무수습
모든 실무수습 활동이 마무리되고 송별회식이 있던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점심은 그 주의 점심식사 당번인 류민희 변호사님의 카레와 계란찜, 레사님의 콩나물잡채로 맛있게 차려졌다. 그 날은 세월호 참사 100일째가 되는 날이었고, 안산에서 시작한 행진이 여의도를 지나 시청광장으로 향하는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침 그 경로가 희망법 사무실이 있는 서소문로를 지나게 되어 있어, 행진이 사무실 앞을 지나갈 때 지지 피케팅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기획소송 준비를 방불케하는(?) 아이디어가 오갔고, 구성원분들의 실행력으로 금세 노란색 종이 피켓이 만들어졌다.
그 날, 우리는 ‘아현동 육교 시민’이 되었다. 육교 위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쳤는데, 오히려 행진을 하시는 분들로부터 응원을 받고 콧물을 훌쩍이며 내려왔다. 행진행렬의 맨 뒤에 합류하여 나란히 걸으며 시청광장에 도달했다. 사전신고내용이었을 1차선 점거 행진은, 바로 옆에서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들과 신호를 받고 선 버스 안에서 내려다보는 눈들에 끊임없이 위협 당했다. 분명히 신고당시보다 늘어났을 참가자 수에 비해 턱없이 좁은 도로를 걸으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집회를 보장받을 권리와 사전신고제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해 보지 않으면, 그 곳에 있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실무수습 출근 첫 날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을,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서성였던 기억이 난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난 4주동안 공동과제를 함께 완성하고,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기쁘게 달려가 알리고, 모두가 함께 노란색 종이피켓을 들고 집회에 참여했던 희망법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인 오늘의 나는, 이 후기를 적으며 생각한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그리고 그 방법을 앞으로 찬찬히 찾아가 볼 생각이다. 여전히 금방 화를 내고, 따라 울고, 스스로의 부족함에 밤마다 이불을 걷어찰 지라도. 앞으로도 나의 든든한 비빌언덕이 되어줄 것임에 틀림없는 희망법을 온 마음으로 응원하며!
글_송지은(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2년, 희망법 2014년 하계 실무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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