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쿨 유학생의 희망법 한 학기 실무수습기
글_염윤호 (로저 윌리엄스 로스쿨)
미국 로드 아일랜드 주의 로저 윌리엄스 대학교 로스쿨 3학년으로 재학중이던 염윤호 실무수습생이 희망법에서의 한 학기 실무수습을 마치고 후기를 보내왔습니다. 염윤호 실무수습생은 로스쿨의 공익인권법 엑스턴십 프로그램으로 희망법에서 로스쿨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이제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15주에 걸친 실무수습 활동과 후기를 전합니다._편집자
<실무수습 마지막날 종강파티에서 염윤호(우)와 지도변호사 한가람>
“다름”과 “틀림”
이 두 단어의 차이에 대한 생각은 3년간의 미국 유학생활 속에서 나에게 불현듯, 아니 필연적으로, 찾아온 ‘반가운 불청객’들이었다. 삼십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며 스스로를 “주류”로 인식하던 나에게 현지인으로부터 전해졌던 “비주류”라는 인식은 두 단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는데 충분했다. 희망법에서의 실무실습 경험은 이러한 불청객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준 소중한 기회였다. 특히, 한국의 로스쿨과는 달리 내가 미국에서 재학 중인 로스쿨은 한 학기 동안 14학점을 취득할 수 있는 공익법 엑스턴십 프로그램(Public Interest Semester in Practice)을 제공하여 그러한 기회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희망법에서의 엑스턴십은 이러한 “다름”과 “틀림”에 대한 나의 이해와 관심을 확대할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희망법에서 보내면서, 희망법의 세 가지 중점 영역인 기업과 인권, 성적지향․성별정체성, 장애 전반에 걸쳐 함께 변호사님들과 함께 일하거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오래 그리고 심도 깊게 누릴 수 있었다.
희망법에서 내가 가장 처음에 접한 사건은 지도변호사인 한가람 변호사가 담당하였던 MTF 트랜스젠더 병역면제취소사건으로, 해당 사건의 경우 당사자들의 최종 변론을 마치고 판결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소송자료를 준비하기보다는 이미 제출한 자료를 읽어보고 이에 대한 사건검토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나의 주요 과제였다. 이제껏 트랜스젠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사건의 주요 쟁점은 물론 트랜스젠더의 삶에 대해서도 무지하였기 때문에, 사건을 읽어내려 가며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송자료를 통해서나마 트랜스젠더인 당사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우리 사회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아왔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내가 얼마나 타인에 대해, 특히 소수자에 대해, 무관심해 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한 무관심 혹은 무지는 차지하더라도,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편견은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설 곳을 앗아가며, 정체성을 숨기게 하고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여 사회적 다양성을 해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랜스젠더는 “다른” 사람들이지 결코 “틀린” 사람들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해당 사건의 재판부는 트랜스젠더인 당사자의 손을 들어주며, 병무청의 병역면제취소처분을 취소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면상으로만 알고 있었던 당사자를 직접 만나서 법정에서 함께 판결 내용을 듣고 기뻐하던 순간은 길었던 인턴 기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의 하나로 꼽고 싶다.
미국 로스쿨에 재학 중인 나에게 주어진 과제들 중 다수는 해외 판례, 법률자료, 외국의 인권단체와의 서신, 영문으로 배포될 보도자료 등을 영어 혹은 국문으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번역 업무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업과 인권 분야의 김동현 변호사와 함께한 현대중공업내의 산업재해 관련 과제였다. 희망법이 소속된 기업인권네트워크 및 여러 노동단체들은, SBS ‘궁금한 이야기 Y’ 등의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소개된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노동자의 사망사건을 위주로 하여 현대중공업에서 발생하고 있는 산업재해의 실태 및 현황을 해외단체, 특히 현대중공업에 선박을 발주하거나 투자를 하고 있는 해외기업에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해왔고,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대중공업에 대해 개선책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작성하였다.
나의 주요 과제는 이미 작성된 의견서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것이었지만, 이 과제는 단순히 문서를 번역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의견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국회 기자회견 및 연관 단체들과의 회의에 참여하는 등 사망사건이 실제로 어떻게 발생하였으며, 이에 대해 관련 단체들이 어떻게 연합하여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의논과정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의견서를 단순히 번역하는 것을 넘어서, 다수 시민 단체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의견으로 표출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고, 그러한 하나의 목소리를 국외에도 전달하여 어떻게 국제 연대를 이룰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수도 없이 반복된 내용 및 오탈자 수정을 끝으로 완성된 국문 그리고 영문 의견서를 배포하였을 때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업무에 마침표를 찍는데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홀가분함과 보람됨을 느꼈다.
희망법의 또 다른 중점 분야인 장애와 관련하여서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변호사인 김재왕 변호사와 함께 일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장애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김재왕 변호사와 다양한 활동을 하며 다시 한 번 내가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 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김재왕 변호사를 도와 놀이기구 탑승이 거부된 지적장애 아동 사건의 변론자료를 준비한 것은 장애 문제에 대한 나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의미 있는 기회였다.
해당 사건에서, 국내의 한 놀이동산에서 아주 어린 어린이에게도 탑승이 허용된 놀이기구를 장애인에게는 단순히 위험하다는 이유로 탑승을 거부하였다. 해당 놀이동산은 장애인에 대한 탑승 거부를 해당 놀이기구 입구에 게재하였고, 입장권 약관에 미리 규정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탑승거부가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거부는 거부를 위한 거부일 뿐, 탑승을 거부해야 할 합리적이고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고 그러한 거부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자의 보조가 필요한 지적장애아동도 놀이기구를 즐기고 싶은 욕구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비장애인의 눈으로 규정한 안전이라는 기준으로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변론준비 과정에서 해외의 놀이동산들은 장애인에 대한 제한이 아니라 장애 유형에 따라 필요한 부가적인 도움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가 장애인의 필요에 대해 살펴볼 여유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희망법에서 보내면서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생활동반자법 국회 공청회 등의 크고 작은 내·외부 회의에 참여한 것, 다른 실무실습생들과 함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공동과제를 한 것 또한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는다. 실무실습 기간 동안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대부분의 사건들이 표면적으로는 각기 다른 개개의 사유로 시작된 것이 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우리 사회가 소수자들에 대해 가진 편견과 오해 혹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름을 틀림이 아닌 다름 그 자체로 바라보고 바라봐진다는 것이 말로는 쉬울 것 같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색안경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모두가 각자의 색안경을 내려놓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동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희망법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변호사님들의 모습을 보며, 때로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로 나의 실무실습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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