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희망법 활동/장애

제3회 공익인권법실무학교《장애, 장애학, 법》강의 녹취록 (하)

김도현 선생님의 <장애, 장애학, 법> 강의 녹취록을 (상), (하) 2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강의는 제3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인상적인 강의를 해주시고 녹취록 연재를 허락하여주신 김도현 선생님, 녹취를 풀어주신 박수빈님께 감사드립니다.

 


 


[제3회 공익인권법실무학교《장애, 장애학, 법》강의 녹취록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장애, 장애학 그리고 '법'

오늘 법에 대한 얘기도 해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법을 잘 몰라요. 그래서 무엇을 얘기할지 고민을 했는데 제가 작년에 봤던 책 중에서 관련된 얘기가 나오는 게 있었어요. 실무학교 자료집 187페이지(3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자료집 다운받기)를 보시면 정치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고 사회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지고 와봤어요.



악셀 호네트, 법과 현실의 괴리에 반응하는 2가지 양식

 

한 사람은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라는 독일의 사회철학자, 프랑크푸르트 쪽에 있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했던 얘기 중에 재밌는 게 뭐냐면, 보통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는 좌파적인 입장에서는 법에 대한 입장이 소극적일 수 있어요. 이 사회를 변혁하자! 이런 주장에 비해서는 법이 조금 소극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건 왜 그러냐면 지금은 시대가 조금 바뀌었지만 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이런 걸 얘기했을 때 여전히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건 어쨌든 맑스 아저씨거든요. 그런데 이 맑스 아저씨가 사회는 상부 구조가 있고 하부 구조가 있다, 토대가 있고 상부구조가 있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이 토대가 뭐냐 정치경제학적인 분석이죠. 자본주의적인 세상, 체계, 이런 것들이 토대가 되는 거고 상부구조는 그 위의, 이것에 의해서 구축된 어떤 이데올로기라고 얘기하는 건데, 그런 이데올로기 중 대표적인 개념이 법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법은 뭐냐 하면 토대가 어떻게 변하냐에 따라서 그것에 맞추어진, 짜맞추어진 무언가, 이런 식으로 수동적으로 인식되다 보니까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토대 속에 놓여있는 차별이나 억압, 이런 것들을 잘 포장하는 역할하는 것, 이런 식의 색깔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었다는 거예요. 전통적인, 약간 경직된 이런 입장에서는 말이죠.

 

근데 호네트 아저씨가 이런 얘기를 해요. 한 사회에 존재하는 합의된 규범, 규범적 원칙이라고 하는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법인데, 이런 것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거예요. 아주 대표적으로 얘기하면, 가장 상위법인 헌법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모든 헌법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기본적인 원칙이에요. 근데 이게 현실과 맞느냐? 괴리가 있죠. 그런데 이런 괴리에도 불구하고 이게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 피쟁을 근거짓고 붙들 수 있다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 하면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양식은 2개가 있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을 놓고 한편으로는 , 그거는 교과서에서 나오는 좋은 소리지.’ 이렇게 냉소적으로 반응할 수 있어요. ‘개소리지 그거는. 현실이 어디 그래? 그렇지 않지. 권력은 저 위에서 가지고 있는 거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파악해서 보면 그 문구는 바로 현실의 억압을 가리기 위한 하나의 치장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자 그런데, 이 법이라고 하는 건 현실과 괴리를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건 무엇이냐. 그것에 대해 그렇게 냉소를 하지 않고 그래. 그러면 우리 이것과 이것을 일치시켜보자.’ 이렇게 대중들이 나설 때 그것이 바로 그 규범을 새롭게 해석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여러분, 장차법은 어떻게 보면 참 간단한 법이에요. 장차법에는 장애인을 장애를 사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제한·배제·분리·거부하면 안 된다. 이런 문구가 있어요.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이것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법에 그렇게 써있다고 그렇게 돼? 장애인이 배제당하지 않고? 그건 법에서 나오는 좋은 말일 뿐이야.’ 그렇지만 그걸 들고 우리가 요구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걸 들고 우리가 싸우자고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걸 들고 우리가 반응할 수 있기도 하다는 거예요.



자크 랑시에르, 평등의 삼단논법

 

사실은 바로 그런 얘기를 마찬가지로 하는 게 랑시에르예요. 자료집 188페이지를 보시면 제가 그 사람이 썼던 얘기를 인용을 했어요. 잠깐 읽어볼게요(이하 붉은 문장은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 2013, pp. 90~91에서 인용). 이 사람이 해방의 삼단 논법, 평등의 삼단 논법 이야기를 해요.

 

삼단논법은 간단하다.” 대전제-소전제-결론, 이게 3단 논법이잖아요. 대전제는 뭐냐, 법이 말하는 바래요.

 

대전제에는 법이 말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법이 말하는 바는 뭐였냐면 프랑스 혁명 시기에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인권선언이 쓰이고 그거에 근거해서 헌법이 만들어지잖아요. 89년 정문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뭐라고 되어있냐면, 모든 프랑스인은 법에 평등하다, 헌법에 그런 말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대전제에요.

 

소전제에는 다른 관점에서 말해진 것과 행해진 것, 즉 평등에 대한 기본적인 법-정치적 주장에 위배되는 사실이나 문장이 있다.” 그러니까 법에는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쓰여 있는데 현실에서는 그것에 어긋나는 문구가 말해지거나 어긋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소전제에요. 그렇다면 대전제와 소전제가 모순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대전제와 소전제 간의 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법-정치적 문장이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문장이 주장하는 평등은 불평등의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만 거기에 있을 뿐인 외양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노동자들의 추론이 선택한 길이 아니다.” 이때 노동자는 뭐냐 하면 1830년대에 파업을 일으켰던 노동자들을 얘기하는 건데요. 그들이 추론이 안 되었다는 거예요.

 

노동자들의 추론이 끌어낸 결론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대전제와 소전제를 유지시켜야 하며, 그러려면 대전제와 소전제를 바꾸어야 한다.” 결론은 뭐냐 하면, 이게 어긋나지 않으려면 법에다가 프랑스의 본질이 모든 프랑스인은 법에 평등하지 않다이렇게 바꾸는 게 한 가지 방법이에요. 이렇게 바꿔놓으면 이 논리에 모순이 없는 거죠.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하느냐?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모순이 없게 되는 거죠.

 

자 그래서, 평등을 말하는 문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장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 힘은 우선 평등이 그 자체를 표방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디엔가 평등이 있다. 이것은 말해졌고 쓰여졌다.” 법적으로, 우리가 얘기한 법 안에. 법치국가잖아요? 법 안에 쓰여졌단 말이에요. 따라서 평등하다고 쓰였으면 그 평등함이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실천은 바로 거기에 바탕을 둘 수 있으며, 이 평등함을 입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예요.

 


입장을 가질 때, 법을 들고 싸울 수 있다 


여러분, 사실은 이 장차법이 만들어질 때도요, 이것 가지고 논쟁이 많았어요. 이 법이 만들어지면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 거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거고 말들이 많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이 장애자법이 만들어지면 모든 장애인 차별이 다 없어질 것처럼 막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약간 냉소적인 입장에서는 그게 만들어진다 해서 뭐가 얼마나 바뀌겠어. 떡이 나와 밥이 나와.’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규범적인 입장은 저는 전자도 아니고 후자도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법이라고 하는 건 여러분, 그 자체로 피해자의 인권을 다 해결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법을 가지고 싸울 수 있다는 거예요. 법이 우리의 인권을 얘기하기 위한 장소를 열어낼 수 있고, 그 싸움을 만들기 위한 바탕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거죠. 저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어떤 위상, 역할이란 건 정확히 그거라고 생각해요. 그 법이 있다고 해서 장애인 차별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 법을 가지고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죠 사실은. 아까 말했던 정당한 이유 없이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 등에 의하여 불리하게 대하지 말라. 이걸 놓고 우리는 요구할 수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여러분, 지금 저희가 장애에 대해서 또 하나의 소송을 진행하고 있어요. 저희가 설날을 앞두고 장애인들이 고속버스 타기를 시작했어요. 설날을 앞두고 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솔직히 장애인들이 고속버스를 탈 수가 없어요. 시내버스를 제외하고 다른 버스들은 장애인들이 탈 수 있는 설비가 되어 있는 것들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가서 탔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그걸 탔느냐.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을 보면 대한민국의 모든 교통약자는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이렇게 쓰여있어요. ‘모든 교통수단이라는 말이 여기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규범이라 하는 것은 언제든 보편성을 가져야 해요.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현실과 괴리가 있는 거예요. 이것도 담고 저것도 담고 하다보면, 이것은 현실과는 약간 괴리가 있는 보편적인 무언가로 남아야 된다는 거예요. 약간 추상적으로 남는 거죠. 그래서 그 내용이 현실에서 다 실현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걸 가지고 싸울 수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쓰여있지 않느냐, 모든 교통수단 교통약자가 다 이용할 수 있다고 쓰여있지 않느냐 하고 우리가 싸우는 거예요. 그걸 달리 해석하는 거죠.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다 해석하지는 못한 거죠. 우리가 그걸 들고, 이런 거니까 해라! 하고 싸우면 그 해석이 달라지는 거고 다른 문장이 만들어지겠죠. 인권은 사실 그렇게 바뀌어 왔다는 거고 법은 사실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법이 언제나 정의는 아니지만요.

 

, 여러분들, 만약에 그렇다면, 법이 우리에게 무기라면 여러분들은 뭐에요? 여러분들은 그 무기를 다루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렇죠? 여기 오신 분들은 무기를 다룰 사람, 다루는 사람들이죠. 그럼 무기를 다루는 사람이 뭐에요? 판타지라면 전사에요, 전사. 여러분들이 전사일 수 있다는 거죠. 여러분들이 전사이기 위해서는 항상 입장이 있어야 돼요. 무슨 이야기냐면, 사실 우리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항상 너희는 불편부당해야한다는 압력을 받아요. 사실 법에서 많이 하는 얘기죠. 불편부당해야 된다는 얘기는 뭐냐면 누군가 깨트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죠? 이 당은 어떤 당파를 짓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현실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되죠. 그리고 당파성을 가져야죠. 입장을 가져야 해요. 우리사회 학자들, 소위 말하는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 뭔가 이것이 기본 자세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저는 이거야말로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약간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아저씨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무슨 얘기냐면 기차를 달리고 있는데 나는 가만히 있을 거야, 나는 가지도 않고 스탑하지도 않을 거야.’ 이러고 있어봐야 기차는 달리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은 멈춰있는 게 아니에요. 세상은 항상 운동하고 있죠. 거기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을 거야 하고 있어봐야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거예요. 이 기차를 멈출 것이냐, 계속 갈 것이냐. 이것 없이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작용을 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론 이것이 갖는 미덕이 있겠죠. 그러나 이것으로만 나의 입장, 법의 입장, 이렇게 해서는 법의 논리적 해석 이상을 못한다는 거죠. 입장을 가져야 된다, 그럴 때에만 법이 그런 무기가 될 수 있고, 싸움이 가능하고,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역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얘기하다 보니까 시간이 다 되었어요. 그래서 제 얘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요. 제 얘기를 듣고 궁금한 게 있으면 한두 가지 질문만 받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질의응답1: 장애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수강생  마지막에 법률가는 전문가로서 전사라고 하셨잖아요.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보통 제 스스로도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야한다는 입장에 동의를 하는데, 막상 현실에서 입법이나 사회적 인식이 장애인에 대한 보호가 시혜적이라는 생각이 있잖아요. 그 시혜적이라는 게 사실 해주면 좋은데 안 해주면 할 수 없지 이런 시각인데,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더 개선이 안 되는 것도 있구요. 그것에 대해서 혹시 제가 가져야 할 시각 같은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장애인을 보호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은 하는데 누군가 라고 물어봤을 때 저 스스로는 인간이니까 동정에 호소하는 방법 밖에 안 떠오르거든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 논리적으로 장애인을 좀더 보호를 해야 된다든지 하는 개발할 수 있는 논리 같은 게 궁금합니다.

 


김도현  우리가 장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때 어떻게 하면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 먹힐 수 있느냐, 사실은 그런 문제일 텐데요. 사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생략을 했는데, 저는 사회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논리는 있어요. 장애문제와 관련해서는 크게 2가지 논리가 실제로 적용되어왔죠. 첫 번째 논리는, 여러분들 혹시 유니버셜 디자인이라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보편적 설계라고 하는. 이것은 우리가 이동권을 주장할 때 많이 얘기했던 거예요. 예를 들어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 만들고 했던 맨 처음에는 사실 우리도 논리가 별로 없었죠. 일단 장애인들이 못 타니까 탈래, 이러고 가서 막 점거하고 도로 막고 만들었어요. 그것도 만들려고 피똥쌌죠, 벌금도 무지하게 많이 먹고. 엄청나게 고생해서 만들었죠. 사실은 그거 장애인들끼리 다 만든 거예요. 이걸 만들어놓고 나니까 이제 지하철, 버스, 이런 공공시설에 편의시설들이 들어오죠. 근데 이거 만들어놓고 나니까 장애인들만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거죠. 실제로 이렇게 만들고 나니 장애인들만이 좋은 게 아니라 노약자도 좋고 연세 있으신 어르신들도 지하철, 버스 이용하기 좋고, 우리 임신부들도 좋고, 아이 데리고 다니는 어머님들도 좋고,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아빠도 좋고, 다 좋다는 거예요. 건장한 남자들도 아주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때는 약간 양해를 구하고 이용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그렇게 야박하지 않아요. 같이 이용할 수 있어요. 모조리 다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애인의 문제를 우리가 얘기하는 첫 번째 논리는 장애인에게 좋게 만들면 장애인에게만 좋은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좋다는 것이에요. 보편적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은 장애인을 위해서 만들자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좋게, 누구도 배제되지 않게 어떤 환경을 만들면 그것은 모두에게 좋을 수 있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죠. 지금 저상버스 문제 관련해서 지금의 저상버스에는 계단이 없는데 정부하고 서울시에서는 계단이 한 개 있는 준저상버스로 바꾸려고 하거든요. 그것을 반대하는 논리도 사실은 이 보편적 설계죠. 준저상버스는 계단이 하나 있고, 일반버스는 2, 저상버스에는 없어요. 준저상버스에는 리프트 장치가 있어서 휠체어 탄 장애인들도 탈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휠체어 장애인에게는 좋겠지만 그 외 다른 교통약자에게는 좋은 게 아니죠.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타기 어렵고, 유모차 끌고 나간 엄마가 왔을 때 리프트를 내려주나요? 아니죠. 계단 한 개를 건너서 타야하죠.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휠체어 장애인에게 좋지만 모두를 위한 버스가 아니게 되는 거니까 반대를 하는 거죠. 이런 논리가 있다는 거예요. 장애인을 위한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환경의 변화.

 

이것이 첫 번째 논리이고,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예를 들어 장애인이 100명 있어요. 100명이 있으면 어느 사회나 대동소이한데, 100명의 장애인 중에서 90%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어요. 통계를 내보면 어느 사회의 장애인이 대략 100명이다 그러면 90명은 비장애인으로 태어났는데 살다보니까 어느 시점에 이런저런 정황들 때문에 장애를 가지게 되는 거예요. 특히 한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가다 보면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몸에 뭔가 한두 가지씩 소위 말하는 impairment라는 것을 갖게 되죠. 그러면서 불편함을 갖게 되죠. 그래서 두 번째 얘기는 우리가 지금은 비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이든 살다보면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걸 만들어 놓으면 지금은 모르더라도 나중에는 분명히 이득을 보게 된다는 거죠. 이것은 소위 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잠재적으로 장애인이다, 예비 장애인이다. 이런 얘기가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장애인들의 권리를 보편화시키고 정당화시키고자 했던 논리에요.

 

이 논리들은 맞는 얘기입니다. 그렇죠? 여러분들도 고개 끄덕이시잖아요. 저도 이 이야기들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공익, 인권 관련해서 활동 하시다보면 장애문제만 접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여기 오신 분들이 장애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겠지만 장애 문제만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 사회에 차별받는 사람이 장애인들만 있는 건 아니라고요. 이 논리들은 물론 맞는 것이지만 저는 장애문제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고 정당한 권리를 얘기할 때 이게 근본적인 지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여러분들, 이 논리를 쓰시면 됩니다. 어차피 싸울 때는 들어가서 걷어차고 하는 거지 항상 스트레이트 날릴 수 있어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싸울 때는 이거 쓰시면 됩니다. 맞는 얘기니까요. 그렇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분,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는 사람은 여성도 있어요. 흑인도 있어요. 동성애자도 있어요. 백인도 있고, 이성애자도 있죠. 근데 여기 비장애인이 있고 장애인이 있는데, 앞서 본 이 논리들만 가지고 얘기해버리면 다른 문제를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죠? 이 경우는 장애인이 좋으면 비장애인도 좋아, 그리고 비장애인이 장애인도 될 수 있어 이런 논리인 건데, 그러면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거에요? 여성이 좋은 게 남성도 좋아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할 거예요? 실제로 그래요? 그게 먹혀요? 그리고 남성 너희도 살다보면 여성이 될 수 있어, 이런 걸 여성의 권리로 주장할 거예요? 그런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건 그런 식의 어떤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성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우리가 같이 해결해야 한다는 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머지도 마찬가지고요. 흑인들이 백인들 이렇게 협박해요? 너희 밤길 조심해라, 내가 밤길에 뒷통수 한 대 쳐가지고 흑인 만들어 버린다. 이러지 않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여성문제라는 말도 하고 장애문제라는 말도 해요. 근데 여성문제라는 말이 여성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서 여성문제가 아닌 거죠. 여성문제라는 말은 사실은 여성과 남성간의 관계의 문제라는 말의 줄임말이에요. 그럼 관계라는 건 뭐냐. 관계는 언제나 양방에 있는 거예요. 여성문제 일방은 여성이고, 여성문제의 또다른 일방은 남성이에요. 이걸 어떻게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냐면 우리가 여성문제를 얘기할 때 여성문제가 해결되려면 2가지가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남자들이 바뀌어야 한다. 여성문제를 해결하는데 왜 남자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얘기를 하나요? 남자가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 얘기인 거죠? 남자가 바뀌어야 여성문제가 해결된다고 얘기하는 건 남성이 그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일방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성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거든요. 여성한테 좋은 게 저에게도 좋아서 또는 제가 여성이 될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그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하나의 관계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럼 장애문제도 마찬가지인 거죠. 아까와 같은 논리들도 맞는 이야기지만 더 근본적으로 왜 장애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가 권리의 문제로 다뤄야 하는 문제냐면. 이 문제가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장애인이 뭐가 문제가 있다고 우리가 얘기하는 게 아니라구요. 장애문제는 뭐에요? 똑같이 비장애와 장애라는 관계의 문제에요. 그래서 장애문제를 해결하려면 장애인도 바뀌어야 하죠. 장애인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지고 단결도 더 잘해야 하지요. 하지만 비장애인들도 바뀌어야 해요. 비장애인도 바뀌고 비장애인, 장애인 간의 차이가 바뀌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장애인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고, 나와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나는 여성문제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장애문제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란 거예요. 이 논리는 무슨 얘기냐 하면 그들이 그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 탓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 탓이 있다는 거예요. 내 탓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시혜, 동정의 문제가 아니죠. 내가 초래한 건데. 다른 인권문제도 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만나기도 하고 약간 다를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관점을 여러분들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건 시혜와 동정이 아니고 연대의식이죠, 책임감이죠. 이것이 나와 무관한 게 아니었구나, 이런 관점. 저는 그런 게 굉장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질의응답2: 정신장애인의 권리와 성년후견제


수강생  생활을 하다 보면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 견고해요. 특히 제가 주위 친구들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장애인은 시설에 있어야 된다는 걸 당연하게 여겨요. 시설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장애문제는 아까 이야기하셨듯이 지체장애인이 타는 그 저상버스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버스에 타고 있는 비장애인들의 인식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 사회에 장애인들이 많이 사회에 나와있지 않고, 또 저상버스가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조사해보면 인식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그래서 비장애인들은 오히려 장애인들이 내 생활에 침범하는 거 아닌가 이런 인식이 굉장히 크다고 봐요. 그게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 현재 사회에 들어오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차별에 대한 인식이 굳어져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그런 공고한 인식이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고민이 되기도 해요. 현재 장애운동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신체장애인 위주로 되어있잖아요. 발달장애인 지원법은 통과되지 않고 대기 중인 듯 하고. 사회복지사법도 법안이 잠깐 나왔다가 지금은 거의 다 예비로 계획되어있지 않고. 지금 나오고 있는 장애에 대한 관련 사건들은 서울보다는 지방에서 더욱더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고. 얼마 전에 있던 신안 노동착취라던지, 화성 정신요양시설에 일어났던 성폭행사건이라던지. 지방에서의 노동착취, 성폭행, 시설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인격적인 대우, 폭행, 이런 것들에 대한 운동은 전혀 없고. 그래도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동권 문제, 편의시설 확충문제라든지 그런 것들도 안 되어 있지만 정말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런 법안이나, 아니면 지방에서 그 사람들의 인권을 터지면 해결하는 게 아니라 찾아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그런 법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런 것들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요?

 


김도현  어떻게 보면 질문이 아니라 의견을 주셨네요. 그렇죠?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장애운동이 사실은 시대를 넘어서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요. 방금 말씀하신대로 이 운동을 보면 신체적 장애인이 있고, 정신적 장애인이 있어요. 신체적 장애 안에서도 지체장애나 능력장애, 감각장애 이렇게 있는데, 분명히 우리 사회에서 장애문제가 제기되는 방식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방식, 받아들여지는 방식 이런 것들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외국의 역사를 봐도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통념과 정의에서 조금 더 받아들이기 편한 것부터 받아들이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전장연 활동도 하지만 사실 그 전에 활동했던 데가 어디냐 하면, 전국장애인부모연대라는 단체에서 함께 발달장애인 잡지를 만들었어요. 그 일을 한 3년 정도 했는데, 여러분들 혹시 성년후견인제도 아세요? 그 제도의 주요 대상이 발달장애인하고 치매노인, 정신장애인 이렇게 되는데, 여러분들 그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성년후견인제도가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거다, 아니다, 자기결정권의 문제... 사실은 굉장히 첨예한 논쟁 속에 놓여있는데요. 여러분, 근대사회에서 소위 말해서 인권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이 인권을 법으로 보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기준이 뭔지 아세요? 그게 사실은 이성이에요. 왜냐하면 근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정의 자체가 이성을 지닌 자가 인간이다 이거예요. 여러분들 옛날에 식민지사회에서 어떤 노예나 식민지 원주민, 이런 사람들 왜 권리가 없었어요? 이 사람들은 이성을 가진 사람의 미개인이라고 안 주는 거예요. 여성들이 권리주체가 되지 못하고, 투표권을 넘겨받은 것도 얼마 안 되었잖아요. 왜 그랬어요? 남성은 이성적인 존재고 여성은 감성적인 존재라고 표상되었기 때문이에요. 아동이 왜 법상에서 권리주체가 안 되나요? 이성이 있지만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 정신적 장애인이 권리주체에서 배제가 되어왔고 그것을 우리사회에서 반대하지 않아 왔나요? 정신장애인은 뭐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현대로라면 이성이 있었지만 잠깐 나간 사람이죠. 발달장애인은 뭐에요? 이성의 발달이 늦어서 아직 계속 아동과 같은 단계에 있다고 보는 거죠. 권리주체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여러분, 지금 남아있는 건 뭐냐면 정신적 장애인이나 아동의 권리를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냐. 이 문제는 사실은 되게 혁명적인 문제에요. 이 혁명적인 문제에서 조금 어려웠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성년후견인제도 지금 피켓 들고 나가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그럴 입장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는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보정한다는 목적에서라면 성년후견제도는 절대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 그것은 그 사람의 정당한 자기결정권을, 여러분들 다 잘 아시겠지만 자기결정권은 헌법에 근거한 거라면서요, 헌법 뭐 제 10조 행복추구권에 근거한 자기의사결정권에 근거한 거라면서요, 그것을 법적으로 정당하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거예요. 그 사람을 법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거거든요. 이런 상황, 이런 논리와 틀 안에서 어떻게 그의 권리가 같은 주체로서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 받아들여지겠어요. 저는 이걸 깨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하나씩 깨야 하고, 마지막 남은 게 저는 이 영역이라 생각을 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과제까지 계속 안고 가시면 안 되니까 지금 집중해보시면 어떨까. 저는 그것을 바꾸는 첫 사안은 성년후견인제도 문제라고 사실은 생각해요.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같이 고민해 봤으면 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고요. 저는 김재왕 변호사님 자주 오시는 전장연 사무실에 항상 있어요. 혹시나 오늘 못 다 한 얘기는 나중에 메일이나 술 한 잔 사주시면 제가 가서 얘기할 수 있고 하니까 나중에 조금 더 얘기하도록 하고 오늘 시간은 이것으로 마치면 좋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박수)

 

 


사회자  우리 김도현 선생님 글을 읽어보면 사실 상당히 어렵거든요. 어려운 이야기를 이렇게 쉽고 재밌게 설명하실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재미있는 강의를 해주셨네요. 특히 (예비)법률가들에게 법은 우리가 싸울 마당이다, 싸워야 할 것이다, 이런 인상적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김도현 선생님께 다시 한 번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리_박수빈, 조혜인



 ☞ 2015년도《제4회 공익인권법실무학교》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