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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희망법

[미디어오늘] 호모포비아, 당신들이 문제다

호모포비아, 당신들이 문제다

[미디어 바로미터] 성소수자는 무수한 고민과 성찰, 용기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여기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사람이 있다. 근절되어야 하는 사랑이 있다.불가능해야만 하는 정체성이 있다. 성소수자로불리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들의 이야기다. 성소수자의 존재 그 자체는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있다면 성소수자들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사람들, 성소수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들을 언어 의미와 상관없이 일단 ‘호모포비아’라고 말해보자)이다.

혹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연애 말고, 감정으로서의 연정. 그 사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해야지’ 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 중에 하나다. 의지가 아니다. 의지로써 사랑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쉽지가 않다는 것은 금세 알 수가 있다.

타인이 시키는 사랑은 어떨까? 누가 당신에게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하거나 사랑하지 말라고 해서 사랑이 마음이 있거나 없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정신분석학적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명시적인 ‘명령’으로서의 사랑 역시 성립하기가 어렵다. 사랑은 의지로도, 명령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명확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만약 당신이 남성이지만 어느 날 여성의 몸을 갖게 되었을 때 자신의 정체성과 태도가 여성으로 바뀔 것 같은지, 반대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남성의 몸을 갖게 되었다고 자아가 남성으로 바뀌는 것인지. 영화에서처럼 어느 날 자기의 몸이 바뀌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성별정체성이 바뀌지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성별정체성은 생물학적인 성별표지로 결정되지 않는다. 성별표지와 성별인식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남성이 생물학적 여성의 표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여성일 수는 없다. 주위에서 아무리 여성이라고 해도, 또 자신을 아무리 여성이라고 생각해도, 그는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울 수 없다. 성별정체성 역시 의지나 명령, 신체적 성별표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성애와 양성애, 동성애, 성별정체성에 관한 간략한 이해이다. 성적지향에 관한 단순한 진실이다.

이성 중 누군가에 대해서만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동성에게만 시선을 쏟으라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없듯, 동성 중 누군가에 대해서만 사랑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성에게 마음을 가져 보라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또 남성에게 여성이 되라고 하거나 여성에게 남성으로 살라고 할 수도 없다. 이것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자들이 벌이는 폭력이 우리 사회에는 넘쳐나고 있다. 호모포비아들, 이 사람들이 문제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많은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사랑과 성별에 대해서 고민하고 탐구하고 성찰한다.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고 생물학적 성별 표지와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과 정체성을 자명하게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성소수자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성별이 어떠한지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사랑과 성별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자신에 대한 무수한 고민과 성찰을 바탕으로 용기를 내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호모포비아들은 윤리나 도덕, 성경을 들이대며 성소수자들을 재단한다. 그러나 나쁜 사랑의 방식은 있을지언정 나쁜 사랑은 없다. 성별정체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과 성별정체성이 윤리나 도덕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사랑과 성별정체성을 윤리나 도덕의 문제로 가져가서 강요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행위가 윤리와 도덕의 문제이다. 타인의 사랑과 성별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윤리적인 태도이고,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일이다. 성소수자를 둘러싼 윤리와 도덕의 논란이 성소수자를 향하고 있지만 오히려 반대로 성소수자에게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하는 자들로 그 대상을 돌려야 한다.

종교적 논리를 동원하는 사람들, 종교의 이름으로 증오를 부추기는 사람들 역시 스스로 깊게 성찰해야 한다. 헌법이 천명하고 있는 정교분리 원칙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이유로 사회에 개입하려고 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들, 그리고 윤리나 도덕의 영역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더더욱 그렇다. 종교윤리를 바탕으로 타인에게 억압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이 세속사회에서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교회 내부에서 역시 성소수자에 대해 억압과 폭력을 가하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여성은 교회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명령 등이 담겨 있는 성경을 이유로 교회 내에서 성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듯,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성경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환대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모두 내쫓고 싶지 않다면, 성경의 모든 구절을 타인이나 교회공동체 내부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최근 차별금지법과 군형법 등을 둘러싸고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그러나 그 논란으로 더욱 드러나는 것은 성소수자들이 아니라 바로 호모포비아들의 문제, 그 비윤리성이다. 타인에 대한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관심과 개입은 우리 사회에 불행을 가져올 뿐이다. 오로지 부정적인 에너지를 사회를 투영함으로써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 뿐이다.

앞서 말했듯 성소수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과 성별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호모포비아와 이 사회의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용기를 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고 한다. 그러나 호모포비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기는커녕, 자기 자신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타인의 심장과 삶을 도려내고 있다.

   
▲ 한가람 변호사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비윤리적인 것은 과연 누구인가?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누구인가? 성소수자에 대한 개입을 끊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 그리고 다른 목소리를 내라. 차별과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 나서라. 최근의 성소수자 논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구성원들의 윤리적 역할과 책임이다.

이것은 ‘성소수자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다. 무엇보다 호모포비아의 문제이다. 성소수자에 대해 개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호모포비아에 대해 개입하여야 한다. 성소수자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방관하는 자들 역시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게이코러스 지보이스(G_Voice)가 만든 한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담겨 있다. “너희가 미움을 가르치고 증오를 자랑할 때 우리는 사랑을 하리라, 노래하리라.” 사랑과 노래를 그치게 하지 말고, 미움과 증오를 그치게 하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않다면 모두가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