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이 중앙집중포즈를 취해서 교수님이 어쩔 줄 몰라하고 계시는 모습.
이 책과의 첫 만남
'동성결혼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가'와의 인연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동성결혼소송 변호인단은 소송을 준비하며 결혼권에 관한 문헌은 한국의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읽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미 21개국에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되는 동안 헌법적 쟁점, 국제사법적 쟁점, 운동사적 쟁점, 공익소송 등 법사회학적 쟁점 등 다양한 논점들이 등장했고, 2000년대 가족법의 새 프론티어이자 사회운동의 표본 같은 주제였기 때문에 문헌도 정말 풍부했다.
그 중에서도 한 미국 페미니스트 경제학자가 쓴 다학제적 접근의 'When Gay People Get Married'라는 책이이 꽤 기억에 남았다.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차분하게 통계와 사회과학적 증거를 인용해가며 반박하는 끈질긴 태도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레즈비언 당사자이자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쓴 1인칭적 서술에 감정이입도 되었다. '커뮤니티' 안에 있었던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운동/커뮤니티 안에서의 동성결혼 반대 이야기도 깨알 같았다.
이 책으로 결정했어!
그렇게 이 책을 기억하고, 우리는 법정 안에서 정당한 권리로서 결혼권을 주장하였다. 소송 과정에서 상대방 측이 제출하는 서면을 '어쩔 수 없이' 읽게 되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설마 이걸 믿는 사람은 없겠지' 싶을 정도의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 대중의 인식은, 우리가 가진 압도적인 법리, 당위, 슬픈 사연들과, 저들의 근거 없는 공포, 그 중간 어디쯤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헌법학 캐스 선스타인 교수의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등 별도의 장의 주제로 등장하는 예는 있었으나, '동성결혼'이라는 이름을 단 단행본은 한국에 없었다. 무엇을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법리만을 생각하자면 Evan Gerstmann의 Same-Sex Marriage and the Constitution 같은 책도 있었다.
하지만 매사추세츠 한 레즈비언 커플이 2000년대 초 동성결혼이 가능한 네덜란드에서 한 모험담 같은 이 책이 자꾸 기억에 남았다. 리 배지트 교수의 지인이면서 경제학을 전공하신 김현경님과 여성학을 전공하신 한빛나님의 완벽한 번역팀과 함께 즐거운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소송 서면 쓰는 것 보다 더 재미있는 번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빛나(좌), 김현경(우) 공역자들과 저자의 만남
나의 감수자로서의 역할은 법률용어에 대한 조언을 드리고, 혼자 '맞아! 맞아!' 이러한 추임새를 뜬금없이 하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우리는 번역하면서 웃기도 많이 웃고 고민도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느낀 책을 관통하는 감정은 저자의 '뚝심'이었다. 이상한 말이 유통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는 사회과학자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그냥 막연하게 너무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번역을 마무리하며 우연히 리 배지트 교수의 일정을 알게 되었다. 리 배지트 교수는 최근 유엔과 월드뱅크에서 '차별의 비용'이라는 주제의 단골 패널로 초청되는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월드뱅크가 위촉한 인도 연구를 통하여 성소수자 차별이 인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기초적으로 도출하기도 한 개발과 차별 전문가이다.
교수님은 올 3월에 이코노미스트지 주최로 런던, 뉴욕, 홍콩 등에서 동시에 열리는 '자긍심과 편견 - 성소수자 다양성과 포함의 경제적 당위' 세미나의 홍콩 이벤트 패널로 초청을 받으셨다. (그나저나 아시아 지역에서 열리는 경제 관련 세미나에 한국 기업이 없는 것은 거의 처음 본 것 같다. 뭐 대단히 잘못 된 것 같다)
한국에 일부러 초청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홍콩에 오신다길래 "그럼 홍콩에 오시는 김에 한국도 오세요~" 장난처럼 드린 요청에서부터 내한 행사 기획은 시작되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리 배지트, 엘리자베스 실버 부부의 개인 기사로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숙명여대, 이대, 고려대, 북콘서트 모두 조금씩 다른 주제를 다루면서 대중이 궁금해하는 요소를 잘 설명해주셨다.
북콘서트 행사는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한 프레임에 존경하는 두 분을 다 담을 수 있다니! 추천사를 써주신 전수안 전 대법관님과 리 배지트 교수.
용기있는 원고와 전문가 증인? 김조광수 감독님은 정당한 권리를 찾는 여정의 소회를 담은 소개사도 쓰셨다.
"동성애자들이 결혼했고,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수줍게 인사하신 엘리자베스, 하지만 어쩌면 더 뼛속까지 활동가인 분이었다.
개인마다 특화된 사연이 담긴 사인을!
주책스럽게 셀피를 찍어보았다
함께 보낸 시간을 돌아보며
이번 방문을 통하여 갓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나서, 어드바이저의 우려어린 조언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 연구를 한 것, 윌리엄스 연구소를 시작한 것 등 배지트 교수의 개인사를 알 수 있었다. '무언가 기여를 해야겠다'는 조용한 분노에서 시작한 일들이 많은 후학을 낳았고 운동에 족적을 남겼다. 리 배지트 교수와 엘리자베스 실버 변호사 부부, 아니 Lee 언니와 E 언니는.. 그냥 옆에 두고 자주 질문으로 귀찮게 하고 싶은 선배들 같은 사람이었다.
소저너 트루스, 에밀리 디킨슨, 최근작 'The Public Professor' 하나같이 Lee와 E 부부 다운 선물들
눈물을 살짝 글썽이게 만든 환송 이후 두 분은 미국으로 돌아가셨고 아마 오늘도 저녁식사에서 정치토론을 하고 있을 것이 상상이 간다. 천생연분 활동가 부부.
리 선배, 이 책 꼭 흥해서 더 멋진 책, '연구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방법 - Public Professor'도 한국에서 번역할게요! 두 분 언제나 건강하시고요! 용기 주신 말씀들 잊지 않겠습니다. 한국 많이 지켜봐주세요.
글_류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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