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민등록번호 제도의 문제점
주민등록법은 1962. 5. 10. 법률 제1067호로 “주민의 거주관계를 파악하고 상시로 인구의 동태를 명확히 하여 행정사무의 적정하고 간이한 처리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으며, 그에 따라 모든 국민에게 이름, 성별, 생년월일, 주소, 본적 등을 시장 또는 읍·면장에게 등록하게 하고, 퇴거와 전입신고를 하도록 의무화하였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처음 규정된 것은 1968. 9. 16. 대통령령 제3585호로 개정된 주민등록법 시행령이었습니다. 1968. 5. 29. 법률 제2016호로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서 주민등록증 발급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위 시행령은 시장 또는 읍·면장이 주민등록을 한 주민에 대하여 개인별로 그 등록번호를 붙이도록 하면서 그 작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내무부령으로 정하도록 하였고, 그 위임을 받은 주민등록법 시행규칙(내무부령 제32호)은 ‘지역표시번호’와 ‘성별표시번호’ 및 ‘개인표시번호’를 차례대로 배열하여 주민등록번호를 작성하되, 개인표시번호는 주민등록의 일시순과 주민등록표에 등재된 순위에 따라 차례로 일련번호를 부치고 성별표시번호에 연결하여 6자리의 숫자로 배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주민등록번호는 12자리의 숫자로 작성되었는데, 앞의 6자리 숫자는 지역을, 뒤의 6자리 숫자는 거주세대와 개인번호를 각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1975. 10. 31. 내무부령 제189호로 주민등록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주민등록번호는 생년월일, 성별, 지역 등을 표시할 수 있는 13자리의 숫자로 작성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주민등록번호는 기존의 12자리에서 현재와 같은 13자리 체계로 변경되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는 위와 같이 도입된 이후 오랫동안 법률상 근거 없이 시행되어 오다가, 2001. 1. 26. 법률 제6385호로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서 심판대상조항이 신설됨으로써 비로소 그 법률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현행 주민등록번호는 OOOOOO-XXXXXXX 식으로 작성되는데, 앞의 6자리는 생년월일을 표시하고, 뒤의 7자리 중 첫 번째는 성별과 출생연대,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는 최초 주민등록번호 발급기관의 고유번호, 여섯 번째는 신고당일 해당 지역의 같은 성을 쓰는 사람들 중에서 신고한 순서, 마지막 일곱 번째는 오류검증번호입니다.
이렇게 구성된 주민번호는 초기 도입 목적과 달리 수십 년 동안 유례없이 여러 인구학적 정보를 담은 번호가 모든 목적(all-purpose)으로 사용되며 수많은 문제점과 인권 침해를 낳았습니다. 주민등록번호는 행정, 금융, 의료, 복지 등 사실상 사회 전 분야에서 개인식별을 위한 기초 자료로 널리 활용되어왔습니다.
주민등록번호 수집 오·남용 및 유출 사고 등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는 2012. 1. 제2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수립에 대한 권고에서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의 폐기 또는 재정비할 것을 재권고하였다. 또한, 2012년 전원위원회의 결정으로 ‘나이, 출신지역, 성별이 공개되는 현행 주민등록번호의 부여체계를 임의번호체계로 변경하고 법원의 허가를 통한 주민등록번호 변경 허용절차를 마련할 것과 기업들로 하여금 실명과 주민등록번호의 수집을 허용하고 있는 법령을 정비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보인권보고서를 채택하였습니다.
또 국가인권위원회는 2014. 8. 5. 결정 주민등록번호제도 개선권고에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개인정보 보호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국무총리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주민등록관련 행정업무와 사법행정업무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다른 공공영역에 대하여는 목적별 자기식별번호 체계를 도입할 것과 민간영역에서 주민등록번호 사용을 허용하고 있는 법령을 재정비하여 주민등록번호 사용을 최소화할 것’, 그리고 국회의장에게, ‘임의번호로 구성된 새로운 주민등록번호체계를 채택하고, 주민등록번호 변경절차를 마련하며, 주민등록번호의 목적 외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주민등록법」이 개정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던 2015. 12. 23. 헌법재판소는 주민등록번호 변경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 주민등록법 제7조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고 결정하여, 주민등록번호의 유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 등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일률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주민등록번호 변경자에게 새로이 부여할 번호 체계에 대하여 기존 번호 체계대로 생년월일, 성별, 지역번호를 유지하고 마지막 2자리만을 변경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기존 번호 체계가 생년월일, 지역, 성별 등의 생물학적·인구학적 정보를 내장하는 것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침해와 위험성은 위와 같이 수차례 지적되었으며 임의의 번호 체계를 도입할 것이 여러 번 권고된 적이 있습니다. 현행 ‘성별번호’ 혹은 어떤 형태로던 이분법적인 성별정보가 내장된 형태의 번호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성별번호'의 문제점
가. 성차별적
먼저, 성별번호는 남성을 1번, 여성을 2번 혹은 남성을 홀수, 여성을 짝수에 배정합니다. 이러한 분류에 의한 번호 부여는 상징적인 ‘젠더 카스트’로서 부당한 성별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이는 해당 개인들뿐만 아니라 성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사회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 10. 17. 결정을 통하여 초등학교 출석부 번호에서 남학생에게는 앞 번호를, 여학생에게는 남학생의 번호를 모두 부여한 후 뒷 번호를 부여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하며 성별에 따른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출석부 번호를 부여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 결정에서 여학생에게 뒷 번호를 부여하는 관행은 어린 시절부터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한다는 차별적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할 수 있고, 남학생에게는 적극적인 자세를, 여학생에게는 소극적인 자세를 갖게 할 수 있으므로, 성별에 따른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출석부 번호를 부여할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번호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한때 인종분리에 의한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영향으로 인하여 13자리의 국가식별번호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번호의 12번째 자리 중 0번은 백인, 1번은 케이프 컬러드(Cape Coloured), 2번은 말레이인, 3번은 그리콰인, 4번은 중국인, 5번은 인도인, 6번은 기타 아시아인, 7번은 기타 유색인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대면을 하지 않아도 이 번호를 통하여 개인의 ‘인종’정보가 수집되었고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규제없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국가·비국가행위자가 이에 기반한 차별을 행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 번호체계 자체로 사회적인 불평등의 고정관념도 강화하였습니다. 1987년 이 분류체계는 철폐되었습니다.
나. ‘성별정보’를 포함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침해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은 자신에 관한 정보가 언제 누구에게 어느 범위까지 알려지고 또 이용되도록 할 것인지를 그 정보주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러한 권리를 제한하는 주민등록번호제도는 단지 주민생활의 편익을 증진시키고, 행정사무의 적정한 처리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국가 혹은 사인이 상대방의 생년월일, 성별, 지역이라는 각개의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는 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합한 수단으로서, 개별적 판단을 통한 정당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렇게 많은 것이 하나로 묶여져 있는 현재 체계로서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인터넷 결제를 하는데 상대방이 내 성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개선법령을 통하여 주민등록번호의 수집·이용에 대한 범위나 제한을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행정, 금융, 의료, 복지 등 다양한 행정영역뿐만 아니라 민간영역에서도 그 활용이 일상화되어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용 시 ‘성별정보가 필요한 상황’, ‘성별정보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많은 국가에서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성별정보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일단 원칙입니다. 이는 요구하는 측에서 목적에 따라 정당화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성별에 따라 다른 사회보장혜택 때문에 관련 부처가 성별정보를 가진다던가, 적극적 조치, 성주류화 등 소수자 집단에 대한 적극적 평등 정책 수립을 위하여 특별히 분류된 정보가 필요하다던가, 인구주택총조사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개별적으로 정당화하여야 합니다.
호주 정부는 성별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별번호는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이며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사생활의 자유, 행복추구권을 침해합니다.
트랜스젠더는 출생 시 지정된 성별(sex assigned at birth)과 다른 성별정체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과정에서 느끼는 성별위화감(gender dysphoria)를 완화하는 데는 이름 변경, 복장, 호르몬 요법, 외과적 조치 등 다양한 조치들이 있습니다.
세계성전환자보건전문가협회 이사회는 2010. 6. 16.에도 “어떤 사람도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확인받기 위하여 외과적 수술 또는 불임수술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라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위 성명에서는 신분 증명을 위한 서류의 성별 표시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성별(lived gender)로 표시되어야 한다면서 각국 정부와 당국에 대해 트랜스젠더와 관련하여 성별정정을 위해서 요구하는 외과적 조치 요건을 삭제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에 대한 국제인권기준인 요그야카르타 제3원칙의 법 앞에서 인정받을 권리에서는 “법적으로 성별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요건으로서 의료적 시술, 예컨대 성전환 수술이나, 불임, 호르몬 치료 등이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성전환자 성별정정’ 제도는 가족관계등록부의 성별변경을 위하여 외과적 수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실제 사회적 성별이 반영된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에 따라 아주 기본적인 사회적 거래 - 핸드폰을 개설한다던지 - 에 주민등록번호 제출을 요구받을 때, 사회적 성별과 다른 성별번호로 인하여 의심을 사거나 차별과 배제를 받기 일쑤입니다. 고용·인사·급여처리 과정에서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한 직업은 미리 포기합니다. 따라서 정규직 진입이 어려운 트랜스젠더들은 빈곤에 쉽게 노출됩니다.
많은 국가에서 트랜스젠더는 성별정보가 있는 공적 문서 중 출생신고서의 성별 변경, 여권의 성별 변경, 운전면허증의 성별 변경, 이런 식으로 목적별 신분증에 기재된 개별적 성별정보를 바꿉니다.
한국과 같이 사실상 모든 곳에 쓰이는 개인식별번호에 성별이 드러나는 곳은 없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서는 성별번호가 있는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이것이 기재된 주민등록증으로 인하여 한국의 트랜스젠더가 매일 일상에서 겪는 차별과 배제를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또한 성별번호는 인터섹스에 대한 차별이며 인터섹스의 개인정보자기졀정권, 사생활의 자유, 행복추구권을 침해합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한 사람의 성별을 결정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중 일반적으로 드는 8가지 요소는, ① 유전적이거나 염색체적인 성 – XY와 XX, ② 생식기관 ③ 내부 생식기 ④ 외부 생식기 ⑤ 호르몬 ⑥ 2차 성징(체모, 유방) ⑦ 출생시 지정된 성별, 사회적인 양육 ⑧ 성별정체성인데, 대부분의 경우는 이 모든 요소가 한 방향으로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고 모호한 상태의 개인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중 어떠한 한 요소(호르몬 등)도 다른 요소보다 절대적인 평가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젠더이분법적인 구분이 불가능한 젠더다변적인(gender variant) 양상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젠더이분법적인 성별 표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중 인터섹스는 총괄어(umbrella term)으로서, 호르몬, 성선, 성염색체 상의 이유로 어느 한쪽의 성별에 딱 들어맞지 않는 성해부학적 신체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출생 시 알 수도 있고, 2차 성징시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여행하면서 신분 확인 과정에서 겪는 차별을 막기 위하여 방글라데시, 인도, 네팔, 뉴질랜드, 독일, 호주에서는 여권의 성별기재에 남성, 여성, 그리고 ‘X'의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현행 성별번호는 자신의 진정한 성별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며 차별과 괴롭힘에 노출되게 합니다.
한편 국가 간 이동시 사용되는 신분증인 여권은 ’이 사람이 그 사람이 맞다‘를 확인하는 목적입니다. 이 상황에서 성별 기재가 꼭 필요한 것일까요? 유엔전문기구인 국제민사항공기구는 트랜스젠더·인터섹스인 사람에게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측면에서 여권에서 성별 정보를 제거하라는 권고를 받았고 이를 검토한 바 있습니다.
인터섹스는 결코 적은 숫자의 성별이분법의 ‘예외’가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출생증명서에 ‘제3의 성’의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기존 성별이분법적인 등록체계 때문에 인터섹스 영아들은 (본인의 동의 없이) 출생 직후 한쪽 성으로 강제 지정하는 외과수술을 받는 인권침해를 수없이 겪었고, 이는 UN 고문방지위원회 최종권고와 고문방지특별보고관의 보고서에도 이를 지적됩니다. 유엔의 성평등 캠페인 ‘HeforShe'는 젠더이분법적인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홈페이지에서 젠더다변적인(gender variant)경우의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유엔 성평등 캠페인 HeforShe 페이지의 이메일 등록 페이지 중 성별 선택 부분 "HeforShe는 성별이 이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전 세계의 인터섹스는 빨간머리를 가진 사람의 숫자와 비슷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성별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재의 성별번호의 존재가 인권침해일 뿐만 아니라 ‘엉터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나가며
이상과 같이 성별을 포함하여 생년월일, 지역 등의 생물학적·인구학적 정보를 내장하는 것의 인권 침해와 위험성은 상당합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른 주민등록번호 변경절차에 따른 번호 체계는 임의번호이어야 하고 다른 것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임시적인 해결책은 현재 진행 중인 인권 침해를 근본적으로 구제할 수 없고 결국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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