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외면의 체계’를 넘어서
[인권오름]영화로 보는 재난과 인권- 다큐 <불온한 당신>
손희정/땡땡책협동조합 조합원 | 승인 2016.04.10 15:09
혐오의 풍경, 하나
2015년 한국 사회를 사로잡았던 사회적 화두는 단연 ‘혐오’였다. 여성혐오를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1990년대 말 이후 온라인 공간 및 대중문화의 장에 언제나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런 혐오의 감정은 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배제와 물리적 폭력을 초래해왔다. 그건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혐오에 기반한 사건들은 고통스럽게 이어졌고 점점 증가했다. 그런 혐오행위/범죄의 연쇄 안에서 폭식투쟁과 ‘세월어묵’처럼 국가적 재난의 피해자들조차 ‘웃음의 소재’로 소환되자 한국 사회는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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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416 시대를 휘감고 있는 “혐오의 공기”
<불온한 당신>(이영,2015)은 혐오의 시대에 우리가 광장에서 대면했던 혐오에 대한 세밀한 묘사다. 감독은 혐오를 표출하기 위해 집단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출몰하는 곳곳마다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다. 절차에 따라 합당하게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제정하라고 요구하는 집회, 학생인권조례개정안 토론회, 세월호 진실규명 집회, 퀴어퍼레이드 등이 <불온한 당신>의 카메라가 당도한 곳이다. 물론 그들은 시민들의 직접행동을 방해하기 그곳에 위해 등장한다.
이 작품은 한국 사회가 다시 보수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기획되었다. 2008년 보수 정권이 집권하면서 ‘종북몰이’가 새롭게 전개되었고, 성소수자를 향한 공격 역시 전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들을 보면서 이영 감독은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불안감을 느꼈고, 그것이 <불온한 당신>의 시작이었다. 사회가 그렇게 성소수자에게 끊임없이 ‘보이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을 ‘보이도록’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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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감독은, “일상이 재난”이라는 은유를 넘어, 실제 재난에 처한 성소수자의 삶을 추적하기로 한다. 일본의 레즈비언 커플 텐과 논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들이 동일본 대지진 당시 경험한 일은 성소수자의 ‘비가시성’이 어떻게 재난 상황에서 그들의 실존적 위기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가족관계를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패널로 참가했던 희망을만드는법의 류민희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참사의 현장에서 성소수자들은 이중의 어려움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증명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는 호르몬 지원과 같은 필수적인 의료지원으로부터 배제된다. 동성애 커플은 서류 상 가족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재산 손실을 제대로 보존받기 힘들다. 무엇보다, 대피소 등 공동생활 공간에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안전을 보장받기 힘든 구조인 것이다.
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던 와중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유가족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이영 감독은 “성소수자를 향하던 혐오가 점점 더 많은, 평범하다고 불렸던 사람들에게도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한국 사회에선 누구나 혐오의 공기를 마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 속에서 혐오에 관한 작업은 계속되었다.
혐오의 카르텔과 “가만히 있으라”
흥미로운 것은 <불온한 당신>이 묘사하는 혐오세력이 비슷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할 만큼 같은 사람들이 혐오의 장면(scene) 여기저기에 ‘겹치기 출연’한다. ‘반동성애 집회’이 있던 사람이 “세월호 이제 지겹다, 그만하자”를 외치고, 또 그들이 ‘종북 좌파가 나라를 망친다’는 공포정치의 수사를 반복한다. 그들의 논리 안에서 동성애자, 종북, 좌파, 피해 유가족은 모두 ‘불온 세력’으로 퉁쳐진다.
이렇게 혐오행위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등장은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보수화와 연결되어 있다. 2000년대 말부터 한국은 급격한 우편향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면서 정치혐오를 팔았던 ‘역사적 블록’은 다양한 형태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합법적 정당의 강제 해산, 평화집회 운운에 국정교과서 추진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 재인식’ 작업, 그리고 최근의 ‘12.28 불가역적 합의’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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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차별을 조장하고 물리적 폭력을 자행함으로써 시민을 위험으로 내모는 세력들이 활개를 치고 있을 때, 도대체 국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류민희 변호사의 말처럼, 국가는 기실 차별을 선동하고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방관함으로써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다. 뿐만 아니라 혐오가 표출될 공간은 확보해주되, 그런 혐오에 대응할 수 있는 소수자들의 대항 공간은 조직할 수 없도록 한다. 무지개재단과 같은 성소수자 법인을 허가해주지 않는 것은 그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국가와 제도가 의도적으로 기울어진 판을 짜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되돌아 가볼 수 있다. 백색 테러에서 간과되었던 그것. 테러범에게 ‘위로금’을 건넸던 그 손이 혐오라는 마음이 그려내는 이 사회의 풍경에 그었던 하나의 획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혐오를 표출해도 된다”, 아니 “어떤 혐오는 표출하는 것이 더 좋다”는 메시지의 전달이었던 것이다.
혐오의 풍경, 둘
하지만 혐오에 대한 논의는 혐오를 조장하고 혐오에 기생하는 ‘특정한 집단’이 있다는 논의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혐오가 하는 일은 조금 더 복잡하고 또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혐오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고 공명하는 공간인 ‘우리’라는 관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고 무한 경쟁이 지상명령이 된 각자도생의 삶이 필연적으로 양산하는 감정이다. 사회적 감정으로서의 혐오란 ‘건강한 나’를 몰락시킬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상쇄시키기 위해서, 나로부터 지워내고자 하는 ‘약한 모습’을 가진 이들을 ‘비인간’의 자리로 격하시켜 나와 분리하여 그 힘을 빼앗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혐오가 강자가 아닌 약자만을 향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래서 혐오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어디서고 재난이 닥쳐와 나를 휩쓸어 갈 수도 있는 재난의 시대를 산다. 그런 삶 속에서 ‘나의 안전’이라는 환상을 영속시키기 위해서, 혐오는 필요하다. 재난 피해자를 나로부터 분리해서 타자화해야 이 불안을 극복하고 삶이 던져놓는 공포 속에서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 416시대, 이 재난의 시대에 혐오가 하는 일은 분명하다. 참사를 ‘나’로부터 분리해서 외면해버리는 것, 피해자를 타자화하여 ‘나’와는 무관한 일로 만들고 고개를 돌리는 것, 그 ‘외면의 체계’를 형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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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면의 체계’가 쌓아놓은 안전이라는 환상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면, 우리도 혐오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과 기록, 그리고 ‘우리’의 재조직
그렇다면 도대체 이 ‘외면의 체계’를 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류민희 변호사의 말은 귀 기울일 만하다.
다큐 보시고 많이 놀라시는 분들이 있죠. 이걸 보고 휴머니즘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갖거나 우울해 하는 분들도 있구요. (...) 하지만 제가 근본적으로 낙관을 하게 되는 것은, 제가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에 함께 했었던 것 같은데, 매 순간을 지나면서 동지와 동료가 더 많아졌다는 점이에요. (...) 저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료를 얻어가면서, 한국 사회가 결국은 가야 할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류민희 변호사는 이 말과 함께 이런 기록이 계속되어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눠져야 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사건의 공유가 마음을 움직이고, 드디어 공감하게 하는 급진적 공간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은 이영 감독이 언급한 ‘오카와 초등학교’의 경우다. 오카와 초등학교는 ‘일본판 세월호’로 알려진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다. 당시 쓰나미가 몰려올 때 그 지역에 대피 지시가 떨어졌지만, 최종 결정권자인 교장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래서 교내 대피 지시가 내려지지 않았고 80여 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했다. 오카와 초등학교는 현재 애도와 추모의 공간으로 존치되기로 결정되었다. 이영 감독은 애도를 위한 공간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록하고, 기억하고, 기어이 그 이야기들을 이어가는 것. 그것은 기실 정성과 마음이 필요한 일일 터다. 이영 감독은 이어서 덧붙였다.
[우리는] 개인이자 홀로 선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사회 속 개인이죠. 오롯이 혼자인 개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다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그렇게 연결되고 공감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영 감독의 말처럼 416 씨네 토크는 ‘외면의 체계’를 넘어서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 중 일부로서 기획되었다. ‘혼자인 개인은 없다’는 말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새롭게 ‘우리’를 조직하려는 노력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노력들은, 나와 남을 가르는 마음이 아니라, 나와 남을 엮어내는 마음에 의지할 때야 가능할 것이다.
※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 웹진 <인권오름>에 실렸습니다.
손희정/땡땡책협동조합 조합원 webmaster@mediaus.co.kr
[원문보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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