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법 활동/장애

시각장애인 변호사의 더듬더듬 투표기

희망을만드는법 2012. 12. 21. 12:52



시각장애인 변호사의 더듬더듬 투표기


글_김재왕


들어가며


19일이 제18대 대통령선거 투표일이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각오로 투표에 임했습니다. 이번에는 혼자서 투표를 해 보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기표 보조


시력을 거의 잃은 2009년 이후부터는 제가 혼자서 투표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내와 같이 기표소에 들어가서 아내가 저를 대신해 기표를 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아내와 저는 정치적 성향이 비슷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아내라도 기표를 맡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밀선거의 원칙


아내가 저를 대신해 기표를 하다보니 비밀선거의 원칙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위법은 아닙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은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비밀선거의 원칙을 지키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예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투표용지수령 및 기표절차)

⑥선거인은 투표소의 질서를 해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초등학생 이하의 어린이와 함께 투표소(초등학생인 어린이의 경우에는 기표소를 제외한다)안에 출입할 수 있으며,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  



투표보조용구


그래도 예외는 예외일 뿐입니다. 시각장애인도 혼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특수투표용지나 투표보조용구가 마련돼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이것만 있으면 시각장애인도 혼자서 기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투표보조용구를 이용해 혼자서 투표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투표보조용구의 수령


투표소에 들어가 투표관리관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장애인등록증을 같이 보여 줬습니다. 그러면서 투표보조용구를 달라고 했습니다. 투표보조용구를 받기까지 조금 기다렸습니다. 아마도 따로 보관하고 있었나 봅니다.

 

인권위 결정례 중에는 시각장애인이 투표보조용구를 요청했는데 투표관리관이 투표보조용구를 제공하지 않아 그 시각장애인이 가족의 도움을 받아 투표를 한 것은 비밀선거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고 차별에 해당한다는 결정이 있습니다. 저는 다행히 투표보조용구를 받았습니다.


2008.12.3자 08진차920 결정 [선거권 행사에 있어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의 미제공] 

지난 2008. 7. 30 서울특별시교육감 선거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투표보조용구가 제공되지 않아 부득이 동행한 가족이 대리투표를 하였던 바, 관련 지자체 선관위원장과 중앙 선거관리위원장에게 선거권자의 선거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비밀선거의 원칙이 준수될 수 있도록 관할 투표소의 선거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할 것과 향후 동일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할 선거구의 선거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관리·감독을 철저히 할 것을 권고한 사례




투표보조용구 

<사진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블로그>



투표용지와 투표보조용구


투표보조용구는 대통령선거용과 서울시교육감선거용 모두 두 개였습니다. 대통령선거 투표용지와 서울시교육감선거 투표용지도 받았습니다. 투표보조용구와 투표용지는 선거에 따라 크기가 달랐습니다. 대통령선거가 후보자가 많아 크기가 더 클 것 같았는데 반대로 더 작았습니다. 


투표보조용구는 A4용지를 반으로 접은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습니다. 접혀 있는 안쪽에는 자석이 있어서 접힌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접힌 투표보조용구의 윗면에 점자로 선거명이 적혀 있었고, 그 밑에 기호와 정당명, 후보자 이름이 점자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가로세로 1cm 가량의 구멍(기표홈)이 나 있었습니다. 


투표용지의 한 귀퉁이는 잘려 있었는데 대통령선거 투표용지는 우측 하단이, 서울시교육감선거 투표용지는 상단이 잘려 있었습니다. 잘린 방향이 일정하지 않아서 잘린 방향을 가지고 투표용지의 위아래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투표보조용구와 투표용지의 맞춤


어려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투표보조용구와 투표용지를 맞추는 일이었습니다. 접혀 있는 투표보조용구를 펴서 접힌 면 안쪽에 투표용지를 놓고 투표보조용구를 덮었습니다. 잘 되었다면 투표보조용구의 기표홈과 투표용지의 기표란이 일치해야 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혼자서 투표용지의 위아래와 앞뒤를 알 수 없다는 점과 투표보조용구와 투표용지가 잘 맞추어 졌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혼자서 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아내가 맞추어 주었습니다.


아내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투표보조용구가 투표용지보다 조금 컸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선거에서는 투표보조용구와 투표용지의 위를 맞추어야 했고, 서울시교육감선거에서는 반대로 투표보조용구와 투표용지의 아래를 맞추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서울시교육감선거에서는 기호 1번이 사퇴를 해서 투표보조용구의 기표홈이 흰색 테이프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첫 번째 기표홈과 첫 번째 기표란을 맞추면 투표보조용구의 기호 2번의 기표홈이 투표용지에서는 기호 1번의 기표란에 맞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투표보조용구의 기표홈과 투표용지의 기표란이 맞지 않아 엉뚱한 곳에 기표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기표


아내가 대통령선거 투표보조용구와 투표용지를 맞추어 준 뒤에 기표를 시도했습니다. 기표홈의 크기가 기표용구가 겨우 들어갈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찍으려는 후보의 기표홈 옆에 왼쪽 검지 손가락을 대고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기표용구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결국 투표보조용구에 기표홈 옆으로 인주가 묻고 말았습니다. 누가 투표보조용구를 보면 제가 누구를 찍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울시교육감선거는 아내에게 기표를 부탁했습니다.



마치며


기표한 투표용지를 접어서 투표함에 넣었습니다. 투표함 입구가 작아서 투표용지를 넣을 때도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투표보조용구는 다시 반납해야 했습니다.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투표보조용구의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투표관리관이 사진촬영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대신 선관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투표를 해 보겠다는 저의 시도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마치 시험 치르고 나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희망법에서는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해 이런 실질적인 부분의 개선에 대한 노력을 계속할 계획입니다. 


글_김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