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비친 희망법

[한겨레21]레드기획-빨간 것이 아름답다

희망을만드는법 2015. 12. 10. 21:55

레드 기획

빨간 것이 아름답다

한국에서 에이즈 진단 30주년, 침묵을 끝내려는 사람들… 십시일반 ‘PL 사랑방’ 만들고, ‘레드 파티’ 열어 퀴어레드기금 마련


제1089호 2015.12.02
 

에이즈 30년, 침묵은 끝났다.

 

이제는 질병이 아니라 혐오가 사람을 죽이는 시대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감염인의 주요 사망 원인은 자살이다. 병든 사회의 ‘에이즈 혐오증’은 건강한 HIV 감염인도 못 살게 한다.

 

올해로 한국에서 에이즈 환자가 발견된 지 30년, 침묵이 길었다. 감염인 당사자가 나서서 ‘감히’ 인권을 주장할 엄두를 못 냈다. 겹겹이 쌓인 혐오의 벽이 존재를 가리고 발언을 막았다. 그래서 12월1일, 올해 ‘세계 에이즈의 날’은 각별하다. 그동안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감염인 당사자가 중심이 되는 인권운동이 벌어졌지만,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자구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HIV 감염인들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건강 정보를 나누고, 인권을 논했다.

 

사랑방 하나만 있었으면

 

몇 번의 계기가 있었다. 치료제가 좋아져서 에이즈는 관리만 잘하면 되는 질환이 됐지만, 인권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2014년 국내 유일의 에이즈 환자 요양병원은 문을 닫았다. 인권침해 고발이 끊이지 않아서다. 더불어 신의 이름을 빌려 아픈 이들을 더욱 아프게 하는 세력은 커졌다. 낙인이 예방을 대신하진 못해서, 2014년부터 한 해 신규 감염인이 1천 명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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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죽음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고전적 구호는 ‘대(對) 사회적’ 의미만 갖지 않는다. HIV/AIDS 감염인 당사자들이 만나 함께 얘기를 나누고 상처를 보듬고 슬픔을 껴안는 것도 ‘침묵을 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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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가 들어선 이래 숙원 사업이 있었다. 인터넷 세상에 분자로 떠다니지 않고 입냄새 풍기는 사람으로 만날 ‘지상의 방 한 칸’이 절실했다. 서울 종로구 연립주택 반지하 24평, 마침내 마련한 ‘PL 사랑방’이 있다. PL은 ‘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약자로 감염인을 편견 없이 부르는 말이다. ‘가진 사람’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지난 11월25일 오후 4시, 사랑방에서 문수 KNP+ 상임대표가 일하고 있었다. 컴퓨터가 놓인 사무실 공간을 나가면 10여 명은 넉넉히 둘러앉을 너른 주방이 있다. 벽에는 ‘생로병사’를 겪는 모두에게 중요한 정보가 보인다. PL들이 마실을 다녀온 ‘장흥관광농원’ 안내지 속에서 그들도 우리처럼 즐기는 여가가 보인다. 책상에 놓인 국민임대주택 안내서는 주거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이 정보를 나눈 흔적이다. 간절히 원하면 만나게 되고 만나면 보인다. “임대주택에 들어갈 자격이 되는데도 어떻게 신청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임대주택 거주자가 아까운 월세를 내는 친구에게 가장 친절한 안내자가 된다.

 

“나처럼 방치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국립의료원, 서울대병원이 가까워요.” 문수 대표 옆에 있던 권미란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활동가가 말했다. 지방에서 검진받으러 올라온 PL이 들르기 좋은 위치란 것이다. 날마다 저녁 밥상을 나누는 이도 적잖다. “오늘은 인터뷰한다고 일정에 적어뒀더니 오지를 않네요.” 문수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그가 가리킨 일정표에는 11월21일 ‘밥상모임’이 공지돼 있다.

 

한 달에 두어 번 진행되는 밥상모임의 11월 주제는 ‘밥과 법’이었다. 공익법무법인 ‘희망을 만드는 법’의 한가람 변호사가 ‘죽음 이후의 법적 관계와 효력 있는 유언장 쓰기’를 주제로 밥상머리 강연을 했다. 무연고 처리돼 장례 절차도 제대로 밟지 못하는 쓸쓸한 죽음이 있어서다. 이날 밥상에는 50여 명이 둘러앉았다. 공간이 없었으면 벌어지기 힘든 일이었다. 사랑방은 PL에게 여기가 끝이 아니라 계속되는 삶이 있다고 온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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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내부의 침묵을 깨는 파티


십시일반 모금이 없었다면 사랑방도 없었다. 138명 기부자와 단체의 후원으로 2200여만원을 모아 어렵게 사랑방을 마련했다. PL,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그리고 이름 모를 사람들, 혐오당하는 이들이 혐오에 맞서는 사랑방을 만들었다.

 

사랑방은 여러 가지 문제의 상담소 구실도 한다. 문수 대표는 “어렵게 들어간 직장이지만 건강검진을 한다고 하면 감염인 스스로 입사를 포기한다”고 전한다. 건강검진 항목에 ‘HIV 검사’가 있어서다. 그러나 사랑방에 상담하면 대응책을 알려준다. 원래 HIV 감염 여부는 타인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법적으로 보호되는 개인정보다. 어렵게 마련한 사랑방의 지속 가능성을 물으니 “지속 가능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나 현재 100여 명인 후원인이 늘지 않으면 ‘자력갱생’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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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페이스북에 ‘레드 셀카’를 올려서 파티를 응원했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빨간 니트를 입고 ‘퀴어레드리본 기금 마련 대박 기원!’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었다. 이렇게 찍은 사진에 “한국의 수많은 PL의 삶이 더욱 든든해지길!”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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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삶의 욕망을 자극하는

 

침묵은 금이다. 말하지 않아도 세상이 자신의 의도대로 굴러가는 이들에게 그렇다. 그러나 침묵은 금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 침묵하라고 강요당하는 이들의 얘기다. “우리 파티에 와서 재미있게 놀아줘서 고마워.”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은 어떤 PL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지지하는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고 우리 얘기를 나눌 사랑방이 있다면, 삶은 욕망을 자극하는 레드가 된다. KNP+가 운영하는 PL 사랑방이 지속 가능하기를 희망한다면, 신한은행 계좌(100-028-202620)로 후원하면 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원문보기]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07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