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법 활동/공익인권법 일반

제4회 공익인권법실무학교 좌담회 "활동가와 변호사가 만났을 때- 활동가가 말하는 '변호사와 일하기" (중)

희망을만드는법 2015. 6. 8. 16:09

4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공개좌담회 녹취록 (중)

활동가와 변호사가 만났을 때 – 활동가가 말하는 변호사와 일하기

 


지난 2015년 2월 7일 제4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프로그램으로 <활동가와 변호사가 만났을 때 – 활동가가 말하는 변호사와 일하기’>이라는 제목의 좌담회를 진행하였습니다그 내용을 (), (), () 3회에 나누어 싣습니다

◇ 공개좌담회 기획의도와 소개 http://hopeandlaw.org/485

◇ 연재순서

(패널 발언(1) : 이미경(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 장여경(진보네트워크 활동가)

(패널 발언(2) : 기선(인권운동공간 활 활동가), 한가람(희망법 변호사)

(플로어 질의응답


☜  제4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공개좌담회 녹취록 (상) 보러가기



패널3: 기 선 (인권운동공간 활동가)

노동자와 변호사가 만났을 때, 인권의 현장에서 보는 변호사와 일하기




장서연 장여경 활동가께 모두발언을 부탁드렸는데 거의 강의를 해주셨어요(웃음). 정말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다음 모신 패널은 기선활동가입니다. 인권운동공간 활, 인천인권영화제에서 활동하시고, 쌍차, 밀양 등 한국사회에서 가장 치열한 인권현장에 늘 달려가시는 인권활동가이십니다. 현장, 특히 노동현장에서 변호사들을 만났을 때의 애기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  선 안녕하세요, 기선입니다. 오늘 진행순서를 보면서 안도했어요. 내가 세 번째구나, 누구 누구 다음이구나, 그럼 내가 할 말은 별로 없겠다(웃음). 앞에서 워낙 잘 애기해주셨기 때문에, 몇 가지 장면을 되돌아보며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면 될 거 같아요.

 

장면 하나. 쌍용차, 희망버스, 그리고 밀양에서 변호사와 만나기

 

시간순으로 할게요. 쌍용차 파업 현장. 그곳은 굉장히 고립된 장소였고, 그 당시만 해도 지금의 희망버스, 대한문의 쌍차와 같은 사회적인 연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극도의 폭력들이 오갔기 때문에 아수라장 같았던 곳에서 변호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저릿하죠. 많이들 다치셨거든요.

 

그리고는 좀 건너뛰어서 희망버스, 기억하시죠. 아까 제가 활동하는 여러 공간을 이야기하셨는데, 일이 많은 곳 중의 하나가 희망버스 사법탄압에 맞선 돌려차기라는 곳이에요. 당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진중공업의 담벼락을 넘어서 현장과 노동자들을 보러 갔죠. 그러면 딱 드는 생각이 있으실 거예요. 음 공동주거침입이군. 들어간 사실이 명료하면 무죄는 나올 수 없는 거로군.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활동가들, 당사자들, 그리고 변호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왜냐면 희망버스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사람들이 계속 찾아갈 거라는 게 너무 명확했거든요. 그리고 검찰, 경찰의 반응이 굉장히 민감하고 기민했어요. 굉장히 빨랐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출석요구서나 이런 조사를 위한 것들,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통장이나 통신을 터는 조치들이 굉장히 빨랐어요. 심지어는 직장에 찾아가기도 하고요. 당시 논의가 두 가지 방향 모두에 대해 이루어졌어요. 먼저 사람들이 이렇게 움직일 것이 예상되는데 이러한 점이 우려된다, 이런 것들은 염두에 두자는 종류의 법적인 검토를 했었죠. 이런 법적 대응은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때에도 법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조금 더 완화해서 대응을 고민해야할 것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또 한 편에는 그러한 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자기의 주장들이 있는 것이고... 이 둘 사이에는 긴장이 있잖아요. 이런 긴장들을 함께 논의하는 것이죠. 이렇게 법률지원과 네트워크를 하는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밀양이에요. 밀양에서는 당연히 법률지원이나 함께 하는 활동이 있었고, 대책위에 변호사가 함께 하기도 했는데요. 작년 행정대집행 때에는 산이 막힐 걸 대비해서 새벽에, 변호인들과 활동가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쫒아올 거 같으니까 평소에는 헥헥거리며 가던 길을 번개 같이 올라가요. 그리고나서 어둠이 가실 때쯤에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이제 곧 행정대집행을 통해 이러저러한 사람들과 맞닥뜨릴 상황이 있을 텐데, 법적인 문제는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거니깐 우리의 행동은 여기까지, 그리고 무엇을 지키자. 이런 애기들을 하는 거죠. 요즘은 이런 긴장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돼요.

 

장면 둘. 법정에서 변호사와 만나기

 

저의 법정에서의 장면도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2008년 촛불집회 건으로 기소되어 현재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어요. 저는 당시 집회 현장에서 다른 인권활동가들과 인권옹호활동, 인권침해감시단 활동을 했어요. 저희가 현장에서 인권침해감시 활동을 하면서 경찰의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계속 항의를 하니까, 경비과장이 '여러분도 (연행버스에) 함께 타시죠' 하면서 인권침해감시단까지 모두 연행을 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기소된 사건이었는데, 그러면 다른 집회 참가자들과 다 같이 묶여서 함께 재판을 받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기억하시기에도 촛불집회 때에는 예전부터 활동하던 사람들만 집회에 나섰던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법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많은 감정이 오고 갔었지요. 사람들과 함께 재판에 대응하는 회의를 하고 최후진술 준비를 하던 때였어요. 함께 재판받는 피고인 중에 한 분이 최후진술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놓고 너무 걱정을 하시는 거예요. 생애 처음으로 판결을 받고 그게 법적인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잖아요. 단순한 두려움일 뿐만 아니라 유죄판결의 실제적인 후과가 있는 것이죠. 집안 사람들과의 문제도 있고, 앞으로 사회에서 활동할 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도 되고요. 이건 여러분들이 앞으로 계속 받으실 인상일텐데요, 여러분들이 법을 매개해서 인권 당사자들을 만날 때 항상 당사자들이 의지 굳세게 싸우는 모습만 만나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어느 때에는 이처럼 사람의 마음 속 바닥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 피고인이 최후진술을 놓고 걱정을 하던 그 때,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이 주문과도 같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럼요, 저라도 당연히 당신과 같이 모든 것이 두렵고 걱정이 될 겁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쭉 살다가 이 건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보면, 아마 당신도 그럴 텐데, 살아가면서 그걸 별로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말은 무죄를 만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와 같은 빈말도 아니었고, 무조건 위로하는 말도 아니었던 거죠. 저는 그 다음에 빵 터지게 됐는데, 결국 그 피고인께서 이렇게 최후진술을 하신 거예요. 판사 앞에서 힘 있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그렇게 할 겁니다.” 물론 본인이 하고 싶으셨던 말은 자신은 다시 그 순간을 마주쳐도 똑같이 행동할 거라는 말이었겠죠(웃음). 이런 주문을 걸어준 거죠. 이게 여러분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비애 중의 하나인 거예요. 법적인 관계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만나는 것은 사람인 거죠.

 

여러분, 변호사들이 대한문 앞에서 집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다가 크게 사건이 난 거 아시고 계시죠? 권 모 변호사님이 기소를 당했고 변호인단이 법정을 가득 채웠다고 하죠. 변호사가 이렇게 현장에서 함께 싸울 때의 모습도 있지만, 어느 때에는 이미 싸우고 난 후에 접견을 하는 그런 장면을 보게 될 때도 있어요. 여러분, '노동자'라고 하면 드는 생각이 있겠지만, 사실 법이나 검찰의 태도가 노동자에겐 꽤 혹독하잖아요. 노동자를 상대로는 나중에라도 문제삼을 수 있는 거리를 많이 쌓아두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쓸데없는 기싸움도 많이 하게 되구요. 그런 일들 중에 기억이 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노동자 한 분이 현장에서 연행이 되었어요. 경찰서에서 조서를 쓰고 나서 지장을 찍으라고 한 거죠. 그런데 영장이 없으면 그걸 꼭 찍지 않아도 돼요. 영장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찍게 되지만, 영장이 나오지 않았을 때 ‘싸인으로 해도 되니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꼭 필요하면 행정망 통해서 영장 받아오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하면 경찰도 대부분 귀찮아서 다시 하라고 안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 연행된 노동자는 체포될 당시에 자본, 기업의 태도에도 굉장히 화가 났지만, 이를 옹호하는 경찰의 태도가 현장에서 아주 편파적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도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분노와 의지를 계속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지문을 찍으라는 요구에 바로 응하지 않고 상담 전화를 해오셨어요. 지문을 반드시 찍어야하느냐고. 그래서 저는 ‘지문날인을 거부하게 되면 이러저러한 과정이 있을 거고, 그래도 그런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영장이 나올 때까지 거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진행될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드렸고 그이는 그 설명을 듣고 지문날인을 거부하기로 결심을 했어요. 그런데 접견을 온 변호인은 거기에 대고 앞뒤를 자르고 이렇게만 이야기를 한 거죠. ‘어차피 영장 나오니까 찍으세요.’ 이것은 중간을 다 생략하고 말하신 거죠. 


이런 두 가지 장면이 제가 현장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변호사들을 만날 때 염두에 두는 인상이에요. 우리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언제든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염두에 두는 거죠제가 이런 얘기들을 했던 것은 몇 가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예요. 제 주제가 노동자에 관한 것이잖아요. 아마 제가 노동권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이 사회에서 계약관계, 고용관계, 임노동관계에 있는 사람이란 것은 사회적 약자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집단적인 권리가 강조되는 것이죠. 사실 이런 것이 노동법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잖아요 여기에서 살짝 아쉬운 것은 집단적인 권리가 강조되다 보니 놓치게 되는 관계들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전교조의 경우에 정치적 자유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맨 처음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노조 탄압'이라고 이야기했었어요. 그 때에 변호사들과 인권 활동가들이 이제는 이 문제를 '정치적 자유'의 문제로 얘기합시다라고 제안했고 지금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요. 또 어떤 노동자가 자신의 일터 안에서 또는 일터와 관련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요. 피켓을 든다거나 어떠한 표현을 쓴다거나. 그러면 사측에서 그 표현을 막기 위해 업무방해 또는 명예훼손 이런 것을 막 거는데 이럴 때 역시 노조가 대응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뭐였겠어요, 노조 탄압이에요.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선전활동을 방해하거나 은폐했다고 얘기하죠. 그런데 이걸 조금만 휘면 정치사상의 자유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의 문제인 거예요. 왜 이런 얘기들을 말씀드리는지는 현장에서 이런 장면들을 맞닥뜨렸을 때 알게 되실 거예요. 언제나 현장에서 급박하게 혹은 집중해서 이야기를 해야할 때는 사안을 좁혀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잖아요. 그럴 때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결들이 있는 거죠. 그것은 사람,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권리라는 것은 사회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인데, 그런 면들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사자와 관계맺고 고통과 대면하며 나아가기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에요. 일단 어떤 사안을 맞닥뜨릴 때 전통적인 법적 검토와 더불어 새로운 해석과 시도들을 할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서 당사자의 생애, 그 공동체, 그 조직의 입장, 그들의 역사, 그런 의미들을 생각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일이 고된 변호활동에 아마 에너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하나입니다. 법적으로, 제도를 통해, 함께 싸운다는 동반 관계 안에서 해낼 수 있는 과제와 의의가 있는가 하면 그 범위를 넘어서거나 범주가 조금 다른 사회적 의의와 힘에 의해서 결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일들도 있는 거잖아요. 저는 그러한 경계를 잘 알고 이해하고 그에 대해서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당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당사자들과 이야기를 하시면서 관계라는 것을 늘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하다못해 성명 하나에도 그이와의 신뢰관계, 함께 가는 동반관계가 드러나잖아요. 아주 솔직하고도 신뢰를 바탕으로, 예를 들면 전략적으로 이런 판단이 든다는 건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하시고, 그러나 당신이 살리고 싶은 의의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할 수 있다, 그럼 우리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하는 것까지도 함께 소통하는 것. 그런 것들이 저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가장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하나 말하고 싶어요

다른 하나는 그렇게 지내다 보면 아마 갖게 되는 에너지도 있고 힘도 생기고 너무 힘들어도 하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또 순간순간 피폐해져있는 자신을 보기도 할 거예요. 왜냐하면 변호인이란 게 그렇고, 특히 현장 당사자들과 만나서 작업을 한다는 건 끊임없이 끝을 알 수 없는 고통과 대면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순간순간 상황이 바뀌고 그와 함께 감정이 회오리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어느 때에는 스스로 주문을 걸기도 하죠. 내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은 눈을 돌리지 않고 떼지 않는 것이다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주문을 걸어봐도 가눌 수 없는 여러가지가 몰려올 때, 그럴 때에는 자기를 잘 가누어 달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적절한 때 한 박자 쉬고, 그이와의 호흡을 다시 맞추고, 이런 과정들을 저는 잘하셨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떤 확신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과 현장에서 계속 만날 거다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속을 뒤집어 까내는 이야기들도 드리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권, 법 그리고 사람

 

인권활동가로서 법과 맞닥뜨리는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마칠게요. 한국은 파업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되게 재밌는 사실이지요. 노동법의 근간은 파업권인데 그 파업권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노동자로 하여금 잘 길들여진 시민도 아닌, 노동자라는 고립된 존재로 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시민과 노동자는 한 몸이잖아요. 그런 면이 하나 있구요. 또 하나는 업무방해죄나 표현의 자유 관련해서 고민이 많아요. 법적인 이름이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죄명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죄명들이 대부분 누구를 겨냥하고 있느냐는 찾아보시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에요. 마지막으로 노동자라는 존재가 어느 때에는 계속 일만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존재로 떠받들여지기도 하지만, 또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남의 돈 먹기가 쉽냐는 말을 참 많이 쓰지요. 임노동관계에서 노동자가 맺은 계약은 노동의 과정에 관한 것인데 마치 그의 인격과 계약한 것처럼 구는 것이 당연시 되고 어느 정도 감수하고 살아가는 게 삶의 처세로 이해되는 그런 면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과 관련해서 사회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왕따 이런 것처럼. 이 문제를 일터 괴롭힘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논의하는 그런 장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마지막으로 함께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내가 다소 지쳤을 때 눈이 번쩍 뜨이게 혹은 무안하지 않게 스스로 일어서서 뭔가 할 수 있게 힘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국은 사람의 일이고, 그리고 법이라는 것들도 사람들이 비참하지 않기 위해서 서로 하는 약속 같은 것이잖아요. 그 안에서 그런 길을 선택한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이 활동들이 무한한 에너지, 그리고 고통도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그런 긴장을 즐기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패널4: 한가람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前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대표)

활동가 출신 변호사의 경험으로 보는 변호사와 일하기변호사로 일하기



장서연 앞선 세 분의 말씀을 들으니까 제 자신을 성찰하게 됩니다. 먼저 이미경 소장님이 반성폭력 활동의 제도화 이야기를 해 주시는데 그동안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들이 어떻게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싶었는데, 장여경 활동가님이 답을 주셨어요. 일상으로 흘러가는 것 중에 사건을 도모하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활동가의 역할이라고요. 기선 활동가가 이야기한 것 중에 변호사의 자세나 태도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못 해봤습니다. 촛불집회를 변론하는 변호사께서 유죄가 되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저는 그동안 무죄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이런 호언장담을 했었거든요(웃음). 현장의 당사자들을 단순히 변호사로서만 대하고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한가람 변호사의 모두발언 부탁드립니다. 승소 전문 변호사시죠(웃음). 왜 게이인권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활동하다가 로스쿨에 가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는지, 그 전후의 이야기를 포함해서 말씀해주세요.

  

한가람 오늘 활동가 패널 중에서 저만 변호사라서 조금 특수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고 두렵기도 하네요. 제가 드릴 말씀은 제 삶의 궤적과 맞물리는 내용이 많을 것 같습니다.


활동가로서 변호사들과 만나기

 

저는 처음에 성소수자 단체 활동가 입장에서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성전환자 성별정정, 가족구성권, 차별금지법 등 제도와 관련한 이슈들이 많이 제기되고 있었었죠. 그런 이슈들을 다루다 보니 아무래도 변호사들을 만나게 되었죠.

 

이렇게 변호사들을 만나면서 들었던 느낌은 세 가지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경계심. 자격증도 있고 나랑 할 수 있는 것의 차원이 상당히 다르다, 권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어요. 솔직히 우리가 부탁하는 처지였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혹시라도 변호사들이 쥐락펴락하게 되면 어쩌지, 그런 경계심이 일단 있었어요. 변호사들과 일하면서도 방어적으로 째려보면서 했던 측면도 있었습니다(웃음).


두 번째는 무시. 아무래도 변호사들은 현장과 떨어져서 활동한다는 생각이 있다 보니까 당사자 그룹의 관점이나 활동의 흐름들, 맥락들 이런 것들을 잘 모르는, ‘법이나 공부하고 책이나 읽던 애들이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2007년에 지금 사회를 보시는 장서연 변호사가 처음 성소수자 이슈를 함께했을 때에도, ‘검사 출신에 과묵하고 점잖은 사람이 잘 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이 있었죠. 또 한편으로는 활동가들이 법이나 제도에 대해 냉소적인 부분이 있잖아요. 제도화는 안 좋은 것이고, 법은 지배계급의 도구다(웃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콤플렉스일 수도 있겠죠.

 

세 번째로 다행이다였어요. 저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변호사들이 많이 해줬으니까요. 군형법상 추행죄의 위헌 문제가 불거지고 헌법재판소에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은 기자회견을 열거나 탄원서를 받는 등 바깥에서의 활동이었어요. 청구인의 대리인으로서 서면을 쓸 수는 없는 것이죠. 단체들 차원에서도 의견서를 써서 내긴 했지만, 아무래도 변호사가 내는 서면과는 의미나 무게가 다른 의견서였겠죠. 변호사들이 법정 안에서 해 주는 부분이 있고, 한편으로 법정 안의 부분에 대해서는 변호사들에게 책임의 전가가 가능한 거예요. 편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는 그런 식으로 업무나 역할이 나름 분리되어 있었는데, 매우 든든했죠.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변호사들이 있다니! 특히 공익인권법재단 공감과 많이 활동을 했는데요. 그 전까지는 전업 변호사가 아니라 틈을 내서 도와주시는 변호사들이시다 보니 업무시간을 뺐을까봐 전화도 잘 못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공감 변호사님들은 활동가들과 친하고 특히 장서연 변호사님은 활동가스럽게 투쟁하시는 편이었고요. 이런 모습들을 보니까, 굉장히 멋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변호사가 되고 난 이후 느끼는 변화, 고민과 성찰

 

저는 처음에는 법대를 졸업했어요. 그런데 저는 법학에는 정말 아무런 관심도 없고 법조인으로서의 미래상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사범대에 입학해서 졸업하고는 기간제 교사로 들어갔어요. 기간제 교사 계약 기간을 마치고 정교사 자리를 알아보았는데, 원서 넣은 곳에 모두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집에만 틀어박혀서 괴로워하다가 에이, 이럴 바에는 로스쿨 가겠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한창 로스쿨이 다음해에 출범한다고 기사도 많이 나올 때였고요. 그리고 공감 변호사님들 활동하는 것을 보니, 변호사 자격 가지고 프로로 활동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죠.

로스쿨 들어가서도 계속 활동은 해야 했습니다. 로스쿨 들어가던 해에 친구사이 대표였고요. 나가서 회의하고 활동해야 하는 시간을 많이 내야 했어요. 3년차에는 아무래도 변호사시험 준비한다고 많이 일하지는 못했는데, 시험 직전에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사건이 터져서 농성장에는 왔다 갔다 하게 되었고요. 그렇게 하면서 로스쿨을 졸업했어요.

 

변호사 자격을 따고 희망법을 만들면서 공익인권법 전담 변호사로 일을 시작했어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두려움과 기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하던 일 똑같아요(웃음). 집회 나가고 기자회견 나가고, 잡일 같은 것도 많이 해야 하고요. 그런데 또 막상 일을 하다 보니까 다른 느낌이 들더라고요. 내가 나 스스로를 규정하기 이전에 타인이 바라보는 내가 달라져 있구나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친구사이에서도 계속 활동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교육, 조직 활동 중심으로 했다면 지금은 법률자문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더라고요.


또 크게 달라진 부분은 목소리 힘이 생각보다 커진 것입니다. 변호사가 되기 전에 혐오범죄에 대해서 공부해서 토론회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어요. 이것을 계기로 한 신문기자님이 코멘트 따고 싶다며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러면서 기자가 제 지위를 물어봐서 친구사이 활동가다라고 하니까 코멘트를 따로 따지 않고 전화를 끊더라고요. 변호사나 교수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겠죠. 지금은 그렇지 않겠죠. 제가 공부한 것의 발전은 많지 않은데도 말의 힘이 달라진 것입니다.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또 달라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법률적인 것들을 저에게 물어보면서 활동가들이 저에게 부탁하는 모양새가 된 거죠. 제가 예전과 비슷하게, 하던 얘기를 할 때에도 무언가 묘한 차이가 생긴 것 같았어요.


한편으로는 변호사님들과의 관계도 또 다르더라고요. 같이 시작한 희망법 변호사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나는 활동가 출신이다이런 자부심이 있는 거예요. 이런 것이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분위기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렇다고 해서 깊이 고민해보지는 못한 것 같아요. 활동가들과의 관계, 동료 변호사들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을 못했던 것 같은데 조심했어야 하는 부분이 많지 않았었나 생각이 드네요. 저는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변호사 자격증, 그리고 활동가로서의 경험이 자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활용하는데 데에만 중심을 기울였지, 이것들을 반성적, 성찰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희망법 변호사들은 스스로 변호사의 목소리가 크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운동을 하면서 변호사들이 너무 앞장서면 안 된다는 생각이 큽니다. 그래서 변호사로서 운동을 주도하지 말라는 희망법 변호사들 나름의 원칙이기도 합니다그런데 앞장서서 마이크 잡게 되는 때도 있더라고요. 지난 연말 서울시청을 점거하고 무지개 농성을 벌였던 적이 있었잖아요. 제가 처음엔 시청 앞에서 피케팅할 때 경찰이 뭐라고 하면 경찰관한테 제가 저분들의 자문 변호사인데, 잠깐 나랑 얘기하자고, 말씀해 주시면 주최 측에 얘기하고 오겠다고, 왔다 갔다 하는 척하죠. 그러다가 방금 전까지 이야기하던 정보과 형사들이 다 있는 데서 어느 순간 제가 박원순 시장이 책임져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웃음). “앞에 나서면 안 되는데하면서도 한편으론 인권변호사 박원순 선배님!’ 하면서 변호사라는 것을 활용하면서 앞에 나서죠. 여러 가지 고민이 많은 자리였던 것 같아요.

 

'활동가 출신 변호사'로 활동하며


이야기를 정리하면, 저는 지금 상태와 활동이 굉장히 좋아요. 인권활동가 네트워크가 있고, 당사자로서 커뮤니티 자원이 있고, 민변 변호사님들을 비롯해서 변호사 네트워크도 있지요. 활동가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변호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활동가 분들이 변호사 자격을 따는 것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에도 활동가 출신 변호사는 이미 있었을 거예요. 제가 아는 분 중에도 노동현장에서 활동하시다가 변호사하시는 분도 있었지만, 저 같은 경우 활동가 출신 변호사를 표방하면서 활동하는 나름 첫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 얘기하면서, 저 스스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탐색해야겠다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장서연 2007년부터 가족구성권 연구모임 등에서 한가람 변호사와 일을 했습니다. 그 때는 활동가였죠. 갑자기 로스쿨 가더니 법률가가 된 거예요. 왜 이렇게 딱딱해졌느냐, 한가람이 변했어, 우리끼리 이랬어요(웃음). 그래도 감수성이 좋은 것인지 활동가 출신이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의뢰인과 상담하면 30분하고 끝나는데, 한가람 변호사는 1시간씩 해요. 교감을 잘 하고, 당사자들에 대해서 이해가 굉장히 깊습니다. 굉장히 좋아요. 좀 변했지만(웃음).



☞ 제4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공개좌담회 녹취록 (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