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공익인권법실무학교《장애, 장애학, 법》강의 녹취록 (상)
김도현 선생님의 <장애, 장애학, 법> 강의 녹취록을 (상), (하) 2회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강의는 제3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인상적인 강의를 해주시고 녹취록 연재를 허락하여주신 김도현 선생님, 녹취를 풀어주신 박수빈님께 감사드립니다.
사회자 김도현 선생님은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학 함께 읽기>의 저자이시고, 우리사회에 장애학을 소개하고 관련 책들을 번역하신 분입니다. 사실 저도 김도현 선생님을 책으로만 뵙고 실물로 뵙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 책을 통해 느꼈던 여러 가지 점들이 궁금합니다. 장애학과 관련해서 ‘장애, 장애학, 법’이라는 주제로 김도현 선생님을 모시고 강의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큰 박수로 김도현 선생님을 맞이하겠습니다.
김도현 오늘 이 주제를 가지고 강의해달라는 얘기를 우리 김재왕 변호사님께 들었어요 제가 있는 단체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라는 연대체인데, 장애계에서 돈 없고 빽 없는 조금 아웃사이더 같은 단체들은 이 쪽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김변호사님이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늘 나오셔서 거기서 뵙기도 하고 인사도 드렸었어요.
오늘 이야기를 드릴 주제는 ‘장애, 장애학, 법’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여성학, 이런 얘기는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장애학은 조금 생소하실 거예요. 그렇죠? 장애학이 대충 이런 거다를 이야기하는 데에만 오늘 1시간이 걸릴 수 있는데 그러다 보면 실제 해야 할 이야기를 못하기 때문에 장애학이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관점에 대해 먼저 보겠습니다. 사실 장애에 대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관점이라는 건 법에서 장애를 규정하는 관점이기도 해요. 우리나라에 장애인복지법도 있고 장애인차별금지법도 있고 다양한 장애 관련 법률들이 있죠. 이런 법들에서 장애를 규정하는 관점과 우리가 장애인의 권리를 얘기하면서 얘기했던 관점이 어떻게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얘기가 조금 길어질 수 있겠구요. 마지막에 인권과 법, 장애인 인권과 법에 대해서는 저도 가지고 있는 얘기가 많지 않아서 최근에 제가 읽었던 책 중에서 여러분들한테 소개시켜드리면 여러분이 그런 문제를 고민하실 때 조금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내용에 대해 같이 얘기 나눠보는 걸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300, 400년 전만 해도 장애인이 없었다?
오늘 얘기를 나눌 주제는 장애, 장애인, 장애인의 인권 이런 것이죠. 제가 강의를 가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이 지구상에 인간이라는 종이 나타나서 살아온 대략 200만 년 정도 된다는 시간 중에서 불과 한 300년, 400년 전만 해도 인간 사회에는 ‘장애인’이 없었다."
이런 얘기를 드리면 얘기를 들으시는 분들의 반응이 크게 한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그런 거 배우잖아요. 고대 스파르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어디서 굴려가지고 기어 올라온 애들만 키웠다더라. 쉽게 말하면 유아살해의 풍습, 이런 걸 배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예전에는 사회가 삭막해가지고 장애인이 태어나면 다 이렇게 없앴나?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들은 손을 살며시 들고 말씀하시죠. 아니, 너 왜 사기를 치느냐, 옛날에도 심봉사가 있고 다 있었는데, 왜 옛날에는 장애가 없었다고 사기를 치느냐, 이러시면서 반론을 막 제기하시는 분도 계시죠. 근데 제가 3~400년 전에 장애인이 없었다라고 얘기하는 건 무슨 얘기냐면요. 물론 그때도 다 있었어요. 팔다리가 조금 불편한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다 있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발달이 늦는 사람들도 있었죠. 다 있었는데, 사실은 3~400년 전만 해도 그런 사람들과 우리가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더 쉽게 말씀드리면 3~4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이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어요. 장애인이라는 말이 없으니까 누군가가 장애인이라고 호명되지 않고 장애라는 말이 부여하는 차별 이런 것들이 존재하기가 어려웠던 거죠.
도대체 그 얘기가 오늘 우리가 얘기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는데, 이 얘기를 제가 일상생활에서 겪었던 맥락을 가지고 얘기하면, 이런 사건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장애인 인권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법률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이죠. 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이 2007년도에 제정이 되는데 아시다시피 이 장차법은 장애계에서 어떤 특별한 일부 단체가 만든 법이 아니고 장애인 단체들이 같이 모여서 연대체처럼 이렇게 활동을 했었거든요. 법률을 만드는 운동이 일어난 당시, 저희 단체에서는 제가 이 담당이었어요. 그래서 회의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장차법 만드는 회의 장소에 조금 일찍 가게 되었습니다. 회의실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 있다 농아인 협회에서 농인 한분이 오셨어요. 사실 저도 그렇게 수화를 잘하지는 못해요 옛날에 조금 배우기는 했는데 다 까먹어서 기본적인 인사나... 하지만 요새는 노트북을 많이 가지고 다니니까 노트북을 사용해서 서로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같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시각장애인 연합회에서 맹인 한 분이 오셨어요. 이 분은 또 제가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친한 형님이라서 제가 가서 인사드리고, 요즘엔 별 일 없냐, 애는 잘 크냐, 둘이 앉아가지고 이런 저런 얘기를 막 했습니다. 근데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저 혼자만 막 떠들고 있는 거예요. 제가 정말 별 생각 없이 두 분도 인사 서로 나누시고 얘기도 나누시고 하세요, 그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분위기가 조금 싸해졌어요.
여러분, 왜 제가 그 말을 하고 나서 분위기가 싸해졌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사실 저는 학교 다닐 때 특수교육이라는 것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부터 장애인분들을 자주 뵙고 또 졸업하고서도 장애인 단체에 있다 보니까 장애인 분들을 일상적으로 자주 뵈었는데, 저도 이런 실수를 했던 게 이런 구성으로 개인적으로 있어 본 경험이 별로 없었던 거예요. 자, 이해가 되신 분들은 되셨겠지만 이 상황이 어떤 거냐 하면, 저하고 농인 분은 수화가 되었든 지화가 되었든 노트에다가 필담을 하든 시각적인 것을 통해서 의사소통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고, 또 저하고 맹인 분은 음성적인 것을 통해서 의사소통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농인 분과 맹인 분은 뭔가 매개가 없으면 의사소통을 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데 거기다 대고 제가 그런 얘기를 했으니 정말 무안한 상황이었던 거죠.
어쨌든 다른 분들이 바로 회의하러 오셔서 무안한 상황이 마무리되고 회의를 마쳤어요.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렇게 3명의 사람이 있으면 보통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상적인 방법에 의하면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람이 하나로 묶이겠어요? 누구와 누가 한 종류의 인간으로 묶이겠어요? 당연히 농인 분과 맹인 분은 장애인으로 묶일 것이고 저는 비장애인으로 그렇게 구분이 되겠죠.
장애인이라는 임의의 범주, 그 자체에 권력관계 존재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제가 아까 장애인이라는 범주가 3~400년 전에 생겼다고 했는데 잠시 장애인이라는 범주를 놓아두고 생각을 해보면 굳이 이 사람과 이 사람이, 농인과 맹인이 그렇게 가까운 존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죠. 그렇잖아요. 사실 이 농인 분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신체적으로 어떤 차이나 특징을 가지고 있던 간에 어쨌든 음성언어라는 것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그 분 기준에서는 한 무리로 보일 수 있어요. 그렇죠? 그리고 이 맹인 분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 사람이 어떤 몸의 차이나 특징을 가지고 있던 간에 어떤 시각적인 것을 통해서 세상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하나로 묶일 수 있겠죠. 그렇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장애라는 범주가 굉장히 객관적이고 당연하고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그 자체로 굉장히 임의적인 범주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이게 임의적인 범주라면 왜 그렇게 생겨서 굳어졌을까, 왜 이렇게 생겼을까. 제가 그런 것을 고민하다 보니까, 아 이게 이것과 비슷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여러분,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같이 살아가잖아요. 저희 같은 황인종도 있고, 백인종도 있고, 또 흑인종도 있고 다양한 혼혈인종들도 있죠. 이런 인종들은 각각의 특성을 갖는, 각각의 인종들일 뿐이에요. 어떤 인종들이 어떤 인종하고 가깝다고 분류할 만한, 구분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죠, 그런데 가만 보면 현재 우리사회는 이런 다양한 인종들을 두 개의 범주로 분류하는 잣대를 가지고 있어요. 백인종들을 빼고 나머지 인종들을 묶어서 우리는 유색인종이라는 범주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죠. 여러분, 그럼 이 유색인종이라는 범주가 원래부터 있었을까요? 예전부터 있었을까요? 그러지는 않았겠죠. 실제로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 범주는 사실은 백인이 나머지 인종들을 식민지배하면서부터 생긴 거예요. 그러면서 만들어진 거죠. 바꿔 말하면 지금 이 지구상에서 인간사회에서 누가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요? 백인이 아직까지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세상이 누구 중심으로 돌아요? 백인을 중심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이 세상의 기준이 백인이고 백인의 선택에 의해 돌아가다 보니까 인종의 구분도 백인이 기준이죠. 기준에 비교해서 나머지를 그냥 묶어버린 거예요. 무슨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약에 백인종이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흑인종이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이 범주는 이렇게 만들어 지지 않고 흑인종을 빼고, 백인종, 황인종을 묶어서 희끄무리한 인종과 흑인종, 이렇게 나뉘었을지도 몰라요. 그런 범주가 생성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 얘기를 드리는 건 뭐냐면 결국은 유색인종이라는 범주 자체가 객관적인 범주가 아니라 그 자체에 이미 일종의 권력 관계가 녹아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장애인이라는 범주 또한 범주의 생성 자체에 사실은 권력관계가 이미 존재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지금 이 세상이 지금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요 비장애인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지금 그러지 않아요? 결국 뭐냐면 그런 것들이 우리가 언제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이 모두에게 평등한 세상이 되면 그때 가면 모르겠어요. 장애인이라는 범주가 사회적으로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고 언젠가는 아주 먼 미래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소멸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장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권력관계를 전제에 두고 장애 문제라는 것을 고민을 해야 합니다.
'장애', '장애인'의 의미
사실 장애라는 범주 자체가 만들어진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기껏해야 3~400년, 그러니까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태동하면서 어떤 역사적인 사건과 계기를 통해서 이런 범주가 만들어지는데, 그 얘기를 다 드리면 그건 또 세미나 버전이에요. 그래서 생략하고 어쨌든 장애라는 범주, 장애인이라는 범주 자체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더 구체적으로 장애 정책이라는 것이 장애가 사회적인 이슈로 달아오르면서 정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정말 오래되지 않아요. 전세계적으로 봐도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 정책이라는 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다보니까 ‘장애인’이라는, 영어로 얘기하면 ‘people with disability’나 ‘disabled people’ 정도가 될 텐데요, 우리나라에서도 이 ‘장애인’이라는 용어, ‘장애’라는 용어가 법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이고, 법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얘기하기 때문에 한 사회에서 쓰이는 공식 언어라고 하는 것은 80~90% 법적인 용어거든요. 그렇죠? 공식 언어는 법적인 언어에요. 근데 대한민국의 법에서 헌법을 제외하고 법률에서 ‘장애’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981년에 만들어지는 심신장애자복지법, 지금은 개정되어서 장애인복지법인 이 법률이 처음이에요. 그 전에는 어떤 법을 뒤져봐도 장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요. 심지어 장애와 관련된 최초의 법인 특수교육지능법, 이 법이 심신장애자복지법보다 먼저 1977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 법에서도 장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80년대 이전에는 장애라는 것이 공식적인 범주가 아니었다는 거죠. 이건 서구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서구사회에서는 3~400년 전부터 장애라는 범주가, 장애라는 말이 있었지만, 도대체 이 장애라는 것이 뭐냐, 누가 장애인이냐 이런 것을 공식적으로 정의한 것은 또 그 시기 즈음입니다.
장애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인 정의는 1980년에 WHO 세계보건기구에서 나온 소위 ICIDH(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Impairments, Disabilities, and Handicaps: 국제장애분류기준)에요. 이게 최초의 장애에 대한 국제적이고 공식적인 정의가 됩니다. 그럼 이때, 이 권위있는 기구인 얘네가 장애를 뭐라고 정의를 내리고 설명을 해주냐면, 이렇게 얘기를 해요.
"이 세상 사람들아, 우리가 굉장히 막연하게 장애라는 말을 쓰고 누군가를 장애인이라고 불러왔는데, 장애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일단 장애는 어떤 사람의 몸에 그것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정서적이든 어쨌든 손상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존재하는 거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런 손상을 가지고 있게 되면 그 손상 때문에 무언가를 하는 데 있어서 제약이 오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제약이 오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자 바로 이게 장애야."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장애는 어떤 사람이 손상을 입고, 그 손상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고, 무언가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불리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장애다. 여러분, 굳이 어떤 문서로 보지 않았던 분들도 이 얘기를 들으시면 이렇게 고개가 끄덕여질만한 얘기라는 거죠. 그렇지 않으세요? 일종의 3단 논법이죠, 이것 때문에 이것이 생기고... 굉장히 막연했는데 되게 논리적으로 정리를 잘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실 거예요.
자, 그런데 이 정의가 80년대 이렇게 나오고 나서, 사실은 이 얘기가 국제기구에서 나온 거니까 꼬부랑 글씨로 나왔을 텐데, 그래서 이 얘기를 우리나라에 있는 장애인 당사자들보다는 서부유럽, 영어권에서 있는 장애인 분들이 이 얘기를 봤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 분들도 이 얘기를 들으니까 그렇게 틀린 말 같지는 않아요. 맞는 말 같아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그럴 때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얘기를 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말은 맞는 것 같은데 기분이 더러울 때가 있죠.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찝찝할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들도 그랬던 거예요. 말은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찜찜해. 그래서 그분들이 이 얘기를 놓고 지지고 볶은 거죠. 몇 명이 모여서 토론도 해보고 세미나도 해보고 때로는 사람들 많이 모아놓고 공청 비슷한 것도 해보고, 그렇게 이 얘기를 놓고 장애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지지고 볶다 보니까 이분들이 어느 순간에 가서 어, 뭔가를 딱 발견한 거예요. 아, 맞다! 이 얘기는 굉장히 맞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사기를 치고 있는 거다, 이건 사기다! 이런 것들이 인식이 되는 겁니다. 장애에 대한 ICIDH의 정의, 이 얘기가 왜 사기일까, 이분들이 왜 사기라고 생각했을까.
신체적·정신적 손상이 있기 때문에 disable하다고?
그 설명을 본격적으로 드리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해볼 수 있어요. 제가 아까 인종에 대한 얘기를 했지만, 여러분 지금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불과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인간사회에 노예제도가 있었어요. 인간사회에서도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 이런 흑인들이 다 노예로 살아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흑인이 노예로 존재하는 이런 상황을 놓고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당신은 흑인인데 당신이 노예가 된 건 당신 피부가 검기 때문이야. 당신은 당신의 검은 피부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 이게 말이 돼요? 이건 듣자마자, 아 그건 어폐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들지요.
실제로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들이 노예가 된 게 검은 피부 때문인가요? 그렇게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은 지금도 우리가 미국에 가보면 지금도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들이 살아가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노예에요? 노예가 아니잖아요. 인종차별 여전히 조금 남아있지만 검은 피부 가진 사람들이 대통령도 한단 말이에요. 그렇죠? 흑인들이 노예였다가 노예가 아니게 된 게 이 사람들이 다 같이 박피 수술을 받아 하얀 피부로 바꾸어서 노예가 아니게 된 건 아니에요. 여전히 피부가 검었지만 노예가 아니게 된 순간이 생긴 거죠. 그러면 이 사람들이 노예였다는 것은 검은 피부 때문이라고는 얘기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흑인들은 검은 피부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노예가 되었을까. 그건 다양하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축약시켜서 얘기해보면 이 사람들이 있는 그 사회가 흑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했기 때문이죠. 차별적인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 힘이 없다고 그 사회가 억압했기 때문에 노예가 된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노예가 아니게 된 건 역시 이들의 검은 피부에 변화가 생겨서가 아니라 차별과 억압에 뭔가 변화가 생겨서인 거죠. 그렇죠? 흑인들이 노예가 된 원인도, 노예에서 해방이 된 원인도, 차별과 억압이라는 문제에서 찾아야지 검은 피부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이건 쉽게 이해가 되는 이야기지요.
자, 그러면 다시 장애의 정의 쪽으로 와보지요. 여러분, 우리가 장애를 영어로 뭐라고 표현하느냐면 보통 disabiliy라고 해요. 불능이라는 뜻이에요. 이 단어를 원래부터 장애라고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우리가 갖는 장애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이것을 장애라고 쓰지 않았겠죠. disability라는 단어가 갖는 원래의 의미는 ‘할 수 없음’이었어요. 이 단어를 가지고 장애라고 정의한 거죠. 그러니까 장애에 대한 이 정의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손상을 갖게 되면 ‘무언가 할 수 없음’의 장애를 가지게 된다는 거예요. 그니까 이 사람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는 원인은 뭐다? 손상 때문이라는 거죠. 자, 근데 이 얘기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어폐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그렇지만 여기에 숨겨진 함정이 있어요. 제가 이제부터 그 설명을 드리도록 할게요.
이 얘기가 왜 사기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먼저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을 드려볼게요. 일단 몸에 손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을 때 되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보통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람들은 어떤 신체적인 손상을 가진 사람들일 거예요. 어떤 사람들이 우선 신체장애인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 다리에 손상이 있다든지, 척추에 손상이 있다든지, 뇌병변장애인이라고 하면 뇌의 특정부위에 손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impairment가 있다는 거죠. 그런 손상이 있어서 휠체어를 이용해요.
그런데 여러분, 저도 여기 올 때 버스를 타고 왔는데 시내에 다니는 일반적인 버스들이 있잖아요. 이런 휠체어를 타신 분들이 휠체어를 밀고 그런 버스 앞에 갔을 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분들이 우리가 타고 다니는, 비장애인이 타고 다니는 일반적인 시내버스를 탈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분들은 ‘버스를 탈 수 없음’이라는 장애를 경험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원인은 뭐냐,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장애 정의에 따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손상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요즘에 버스를 타시다 보면 일반적인 버스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버스들이 있죠. 버스가 바닥이 낮고 계단이 없고,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버스 뒷문 쪽에서 램프가 나오게 되는 버스들이 있어요. 보통 저상버스라고 부르는데, 아까랑 똑같은 손상을 가진 사람이 다리든, 척추든, 특정부위든 똑같이 휠체어를 밀고서 이번에는 그렇게 생긴 저상버스 앞에 간다면, 이 분은 버스를 탈 수가 있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잘 생각을 해보면 몸이 편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동일한 사람이 버스를 탄다고 하는 동일한 행위를, 내 몸은 변하지 않았는데 어떨 땐 할 수 있고 어떨 땐 할 수 없어요. 그러면 이 버스를 탈 수 없다는 원인을 내 몸에 있다고 할 수 있나요? 여러분, 이제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논리에서 원인이라는 것은 뭐에요? 각각 결과가 나와야 원인이죠. ‘~이기 때문에’라는 원인을 붙일 수 있어야 하는 건데,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버스를 탄다는 행위를 어떨 땐 할 수 있고 어떨 땐 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럼 이 사람이 버스를 탈 수 없는 원인은 내 몸에 있는 게 아니라 어디 있는 거예요? 버스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장애의 원인은 손상’이라는 논리는, 우리가 그렇게 인식해왔고 설명해왔지만 사실은 사기라는 거죠. 사기라는 거예요.
자,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우리가 청각 손상을 지니고 있는 농인 분들을 보고 보통 이런 생각과 표현을 해요. 아, 저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죠. 아주 자연스럽게. 기존의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통상적인 정의대로 하자면, 청각의 손상을 가진 농인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건 이 사람의 청각의 손상 때문이죠. 근데 여러분, 제가 길을 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어떤 외국인이 다가와요. 그래서 저는 쓱 피해가고 있는데 그 사람이 더벅더벅 걸어와서 딱 서가지고 저한테 갑자기 영어로 말을 거는 거예요. 국적은 모르지만 영어를 쓰니까 영국인이라고 칩시다, 영국인이 와서 저한테 영어로 와서 막 말을 걸고 그러면 제가 어떻겠어요? 몹시 당황스럽겠죠. 왜 당황스럽냐면 우리가 분명 중고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긴 했지만 입시공부만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hearing이 안 된다구요. 그 사람 말이 들리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리고 어쨌든 어찌저찌 한두 단어 겨우 알아들어가지고 제가 더듬더듬 얘기해봐야 발음이 후지니 그 사람이 내 얘기를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러니 제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참을 띵띵거리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지고 땀은 삐질거리고 당황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니 이거 봐라, 내가 지금 외국에 여행을 간 것도 아니고 여기는 한국 땅인데 한국 땅에서 영어를 못한다고 내가 왜 당황해야 하지?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지, 내가 이럴 필요가 없었지. 내가 왜 쟤네 말로 이야기를 못한다고 끙끙대야 돼? 그때부터 자신감이 드니까 제가 한국말로 얘기하는 거예요. 아니 이 사람아,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로 얘기를 해봐라, 니 말을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저는 한국말로 얘기를 해요, 그 사람한테. 자 그러면 저는 이 사람한테 한국말로 막 떠들고 이 사람은 저한테 영어로 막 떠들면 우리 둘이 의사소통이 잘 되겠어요? 안 된다고. 이 사람은 뭔가 저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겠지만 그 답을 얻지 못하고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저렇게 침을 튀기면서 열을 낼까 이렇게 의아해하면서 어깨 한번 으쓱하고 뒤돌아갈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건 이런 경우에 제가 뒤돌아서 멀어져 가는 영국인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저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놈’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 둘의 의사소통이 안 되긴 했는데 굳이 저 사람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요, 그렇죠?
자, 그럼 이번에는 저는 똑같이 있고 여기 농인이 있다고 생각해 봐요. 영국인의 자리에 농인이 있어요. 농인은 저 같은 사람을 청인이라고 불러요. 물론 공식적인 언론이나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는 건청인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렇게 청인 앞에 ‘건강하게’라는 말을 붙여 버리면 농인은 건강하지 않다 이런 어패가 있어서 최근에는 청인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저 같은 청인이 있고 농인이 있어요. 저 같은 청인은 보통 의사소통을 시도할 때 뭐로 하죠? 그렇죠, 말로 합니다. 입으로 해요. 이걸로 의사소통을 시도한 거죠. 그럼 농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뭘로 의사소통을 시도하겠어요? 그렇죠, 수화로 한단 말이죠. 손으로 해요. 손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죠. 자 그러면 한 쪽은 음성언어로, 입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다른 쪽은 수화로, 손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면 우리 둘이 의사소통이 잘 되겠어요? 잘 안 되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기서 청인과 농인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나 영국인과 한국인이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거나 이게 사실은 매일반 아니에요? 아니, 이게 왜 매일반이냐 하면, 사람들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건 그 사람들이 각자 자기 모국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이 경우 내 모국어는 한국어, 영국인의 모국어는 영어. 이 경우에는 청인의 모국어는 음성언어, 농인의 모국어는 수화어. 그러니까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적나라하게 이 경우(영국, 한국)에는 누가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거예요. 근데 왜 이 경우에는 이 사람(농인)이 뭘 할 수 없다고 얘기하느냐는 거예요. 그 자체가 일단 어패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어패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건 왜냐,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이 세상이 청인 중심으로 굴러가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거죠. 근데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 조금 더 얘기를 진행해보면 여러분, 한국인과 영국인이 있을 때 한국인과 영국인은 언제나 의사소통이 안 돼요? 언제나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요? 그렇지 않잖아요.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또 세련되게 의사소통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세련되게 의사소통이 되는 건 크게 두 가지 경우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배울 수 있는 쪽에서 다른 쪽의 언어를 배우면 돼요. 예를 들면 이 경우에서는 제가 그냥 더럽다, 국제화시대니까 영어를 배우고 만다. 영어를 배워버리면 의사소통이 잘 실현되겠죠. 근데 또 모든 한국인이 영어를 잘 할 수도 없고 잘 할 필요도 없어요. 영어를 다 할 수는 없다는 거죠. 근데 그런 경우에도 의사소통이 잘 될 수가 있어요. 여기에 통역이 들어오면 돼요. 우리나라 높으신 양반들이 외국에 나가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이 회담도 하고 일도 잘 보고 돌아오는 게 그 사람들이 다 외국어를 잘해서가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은 필요할 때 어떠한 편의가 제공이 돼요. 통역이라는 서비스가 제공이 되니까 의사소통이 안 될 리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의사소통이 잘 될 수 있는 건 청인과 농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둘이 의사소통이 항상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잘 되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어떤 경우? 한국, 영국의 경우랑 똑같다는 거예요. 언어를 배울 수 있으면 한 쪽이 배우거나, 그래서 이 경우에는 청인이 수화를 좀 배우는 거예요 그런데 또 모든 청인이 수화를 잘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왜냐면 이것도 언어이기 때문에 계속 써야 하고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는 사람들은 배웠더라도 까먹게 돼요. 쉽지 않다고요. 그래서 제가 수화를 배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필요할 때 적절하게 수화 통역이 들어오면 돼요. 그러면 의사소통이 잘 돼요. 그럼 생각을 해보자는 거예요. 우리는 농인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고 얘기해왔지만 사실은 생각해 보니까 이 사람, 이 농인이 청각에 손상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도 의사소통이 잘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의사소통이 잘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의사소통이 안 되는 원인이 이 사람의 청각 손상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얘기할 수가 없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보면 여러분, 지적인 영역의 손상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최근에는 발달장애라는 용어를 많이 써요. 지적 장애인과 자폐 장애인, 이건 정서적인 여러 면까지 포함하는 거지만 어쨌든 신체적, 정신적 이렇게 나눴을 때 정신적인 영역에서 발달이 늦은 사람을 발달장애라고 불러요. 그런데 여러분 현재 우리나라에서 장애 영역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사회 서비스가 뭐냐면, 소위 활동보조서비스라고 하는 거예요. 이 활동보조서비스라는 건 뭐냐면, 노인 장기요양보험제도는 아시죠? 거기서 어떤 신체적인, 어떤 일상생활에 주는 서비스가 있잖아요. 그 비슷하게 어떤 신체적인 손상이 있고 일상생활의 어떤 환경이 갖추어 있지 않으면 불편한 분들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애인에게도 그런 자립생활을 위해서 서비스가 제공되는 거예요. 최근에는 제도가 조금 확대되어서 활동지원제도라고 부르고 있어요.
이 활동보조서비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언제냐면 2007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이 돼요. 이게 뭐 전국에서 알아서 만들어진 건 아니고 2002년도에 장애인분들이 힘들게 싸워서 만든 거예요. 정말 박터지게 싸워서 시청 앞에 가서 집회하고, 국가인권위 가서 다시 집회하고, 수도 없이 하고. 이런 게 필요하다, 이게 장애인의 정당한 권리다, 그래도 알아먹지 못하니까 나중에는 장애인분들이 한강대교에 가서 휠체어에서 내려가지고, 거의 기다시피 남단에서 북단까지 7시간을 기어다니는 퍼포먼스까지 해서 만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서울시를 먼저 깨고 다른 지방도 깨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전국적으로 하겠다, 이렇게 돼서 2002년도 말에 전국적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시행하는 기획안이 나와요. 그런데 정부에서 최초로 내려왔던 활동보조서비스 기획안에는 어떤 특정 유형의 장애인들은 빠져있었어요. 제외되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지적장애인, 자폐성 장애인과 같은 발달장애인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제외가 돼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왜 제외가 돼있었느냐, 우리도 이렇게 기획안이 나온 것을 보고 열받아서 달려가서 난리를 쳤더니, 굉장히 당연하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활동보조서비스는 장애인들이 자립을 하기 위해 필요한 서비스가 아니냐. 그런데 지적인 영역에 impairment, 즉 손상이 있는 사람들은 그 손상 때문에 자립을 할 수 없는데 왜 그 서비스를 달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그 서비스의 취지와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거죠. 이건 자립을 위한 서비스인데 왜 자립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서비스를 주라고 하느냐. 이러면서 태연하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가 차별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상황, 현실을 놓고 보면 마냥 틀린 얘기라고만 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어요. 요즘 장애인 인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탈시설’이예요. 장애인들이 수용시설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자립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게 큰 이슈이죠. 그런데 우리나라 전체 장애인 중에서 발달장애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아요. 전체 등록된 장애인 중에서 발달장애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한 7% 정도 밖에 안 돼요. 그런데 생활시설을 보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들 중 70%정도가 발달장애인이에요. 무슨 얘기인지 알겠죠? 실제로 차지하는 비율은 7%인데 시설에 가면 70%가 발달장애인이에요. 굉장히 많은 발달장애인들이 자립하지 못하고 시설에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설령 그런 시설에 수용되지 않은 발달장애인이라 하더라도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로 나와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집에만 갇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시 정부가 한 얘기를 막 틀렸다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또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죠. 최근에 이 탈시설 문제가 화두가 되면서 몇 년 전부터 장애인 인권단체 활동가들 중에서 운이 좋으면 외국에 연수를 나가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어요. 물론 우리는 돈이 없으니까 우리 돈으로는 연수를 못 가고 외국에서 지원을 해줘서 연수를 나가게 되는 경우인데, 그런 친구들이 호주도 가보고 캐나다도 가보고 미국도 가보고 북유럽도 가보고 일본도 갔다 와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다녀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혹은 연수보고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그 동네에서는 발달장애인들이 우리나라처럼 시설이나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 속에서 자립을 잘 하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들었던 사례들 중에 가장 쇼킹했던 사례가 어떤 것들이냐면, 노르웨이 같은 경우 1970년도에 어떤 계획을 만들었냐면 당장 그러기는 힘드니까 5년간의 유예기간을 주고 모든 장애인에 대한 생활시설들을 폐쇄시킨다고 했어요. 그래서 5년이 지난 75년이 되었을 때, 그 때도 아직 시설이 조금 남아있었고 장애인들도 있었지만, 실제로 전부 폐쇄시키고 장애인들을 내보낸 거죠. 법에 어떻게 되어 있었냐면, 장애인들 나오고 나면 그가 원래 살았던 원지역사회로 가라. 그리고 그 사람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과 서비스에 대한 모든 책임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져라. 그래서 노르웨이에 가면 이미 1975년, 즉 30여년 전부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시설이라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시설에 있었던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에서 자립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생각을 한 번 해보자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발달장애인들이 많은 경우에 자립을 못 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 이유가 그 사람에게 손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동소이한 어떤 지적인 손상을 지닌 사람들이 다른 동네에선 자립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떤 발달장애인들은 자립을 할 수 있고 어떤 발달장애인들은 자립을 할 수가 없는데, 이게 어떤 지적인 손상으로서의 큰 차이 때문일까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있는 지적장애인들은 평범한 지적장애인이어서 자립을 못 하는 거고 그 쪽 동네의 발달장애인들은 다 슈퍼울트라 발달장애인들이라 자립을 하는 걸까요? 그런 건 아니잖아요. 이 사람들이 어떤 동네, 환경에서는 자립을 하는데 다른 동네, 환경에서는 자립을 할 수 없다면 이 자립할 수 없는 원인을 손상 때문이라 얘기할 수 없다는 거에요. 그렇죠?
자 그래서 정리를 해보면, 우리가 지금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그것이 신체적이 되었든 정신적이 되었든 impairment라고 불리는 차이를 가진 사람이 뭔가를 할 수 없을 수도 있어요. 그 사람들이 버스를 탈 수 없고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자유롭게 살 수 없을 수도 있죠. 그러나 그 원인은 손상 때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법에 장애에 대한 원인이 무엇이라고 되어있는지 아세요? 어떤 신체적인 손상 때문에 일상생활에 상당한 제한이 있는, 이게 장애의 정의에요. 그런 정의 자체는 사기라는 거죠. 이렇게 현실을 뜯어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편집자주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장애와 장애인) ① 이 법에서 금지하는 차별행위의 사유가 되는 장애라 함은 신체적·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를 말한다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쭉 얘기를 드린, 이것이 장애학이 가지고 있는 장애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이고 시선이에요.
손상은 특정 상황과 관계 하에서만 장애가 된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관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대부분 법을 공부하고 있겠지만 법 자체를 어떻게 보느냐 그 관점에 따라서 다 입장이 다르잖아요. 그런 관점에 따라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가 다 다르다고요.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통상적인 관점과 장애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만들어낸 이 관점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장애학이 별 게 아니라, 차별받던 여성들이 여성운동하면서 막 얘기했던 게 여성학이잖아요. 장애학도 그런 건데, 그 장애학의 관점에서는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원인이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 관점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장애의 문제가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권리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한 거죠.
근데 처음에 장애인들이 이런 얘기를 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대답했어요. 야, 장애를 가지고 그렇게 얘기하는 건 조금 big idea다. 저는 맨 처음에 big idea라고 그러기에 어! 좋은 말인가 보다 했어요. big idea다, 이러면 웅진씽크빅 딱 생각나잖아요. 뭔가 담대한 사상, 거대한 사상! 이런 좋은 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big idea는 그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르면 황당무계한 뭐 이런 뜻이래요. 황당무계한 생각. 그러니까 그건 말이 안 된다, 그건 황당한 생각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신 거예요.
근데 여러분, 만약 이게 big idea라면 이것도 황당무계한 소리에요. 제가 방금 여성학 얘기 잠깐 했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 이러한 얘기는 의식들이 많이 퍼져 있는데, 여성의 문제를 얘기할 때도 우리가 sex와 gender를 구분하잖아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다 성이 되겠지만 sex와 gender를 구분한다구요. sex라는 건 말 그대로 신체적인 차원에서의 성이죠. 생물학적인 차원, 인간학적인 차원에서의 성이죠. 내가 어떤 염색체를 가지고 있느냐, 내가 어떤 성계를 가지고 있느냐 때문에 구분되는 몸의 차이로서의 성이라고요. 그리고 gender는 뭐냐. 아시겠지만 우리가 사회적인 성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남자애들은 파랑색 좋아하고 여자애들은 빨강색 좋아하고, 남자애들은 용감하고 공격적이어야 하고, 여자아이들은 다소곳하고 얌전해야하고, 남자애들은 뭐 밖에 가서 해보여야 되고 여자애들은 집안일 잘하고 요리 잘하고. 이런 식의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성역할, 성적 구분이죠. 그런데 옛날 여성에 대한 차별이 훨씬 더 심각할 때에는 여성들이 얌전하게 집안일 잘하고 다소곳하고 이런 거는 그냥 타고난 거다, sex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얘기를 했어요. 하지만 여러분, 물론 남자아이들이 파랑색을 좋아하고 여자아이들이 붉은 색을 좋아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특성들이 그 사람이 다 타고난 거예요? 아니죠. 그렇게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래서 여성학에서 제일 유명한 명제가 그거잖아요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렇게 설명했다구요. sex 때문에 gender가 만들어진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 가서 여자는 태어나길 원래 그래야 하는 거야 이렇게 얘기하면 귀싸대기 한 대씩 맞는다고요. 그렇죠? 우리는 지금은 이게 원인이 아니라는 걸 다 인정하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우린 지금 이거랑 마찬가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제가 흑인, 노예 얘기도 했지만 모두 마찬가지의 얘기를 하는 거예요. 누군가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어떤 impairment의 차이가 있다는 것, 어떤 sex의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impairment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노예가 되는 문제, 어떤 gender로 만들어지는 문제, 어떤 장애를 겪게 되는 문제와 인과관계로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제 진짜 정리를 해보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상가들은 말했대요. 흑인은 흑인일 뿐이다. 흑인은 특정한 상황과 관계 아래에서만 노예다. 특정한 상황과 관계 아래에서만 노예다. 그러면 그 특정한 상황과 관계라는 게 뭐겠어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차별적인 상황, 억압적인 관계를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 이런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어떤 impairment를 가진 사람, 손상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때 그 손상은 사실은 손상일 뿐일 수 있다는 거예요. 손상 때문에 장애인인 것이 아니라, 손상은 손상일 뿐인데 그것 역시 특정한 상황과 관계 아래에서 장애가 된다는 거예요. 특정한 상황과 관계가 뭔가를 할 수 없게 만들 때 장애가 된다는 거죠. 우리가 차별금지법에서 얘기하는 ‘정당한 편의’에서 정당하다는 게 뭐에요? ‘뭔가를 할 수 없게’ 하는 그 특정한 상황과 관계 아래에 놓이지 않도록 만드는 행위, 바로 그 행위가 정당한 행위라고 보는 거죠. 그렇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받으면 그 사람이 ‘뭔가 할 수 없게’ 되지 않는 거죠.
편집자주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차별행위) ① 이 법에서 금지하는 차별이라 함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를 말한다. 3.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에 대하여 정당한 편의 제공을 거부하는 경우 ② 제1항제3호의 "정당한 편의"라 함은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같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애인의 성별, 장애의 유형 및 정도, 특성 등을 고려한 편의시설·설비·도구·서비스 등 인적·물적 제반 수단과 조치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장애 인권을 바라보는 관점, 우리가 장애 관련 법과 관계해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어떤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정리_박수빈, 조혜인
[제3회 공익인권법실무학교《장애, 장애학, 법》강의 녹취록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