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승소와 강정의 기억
프로 야구에서는 타자가 데뷔 후 처음으로 안타를 치면 동료선수와 감독이 그 공을 챙겨 줍니다. 평생 잊지 못하는 그 순간을 기념하는 선물인 셈이죠. 변호사에게도 첫 승소사건은 아마 그런 느낌이 아닐까요.
변호사로 첫발을 내딛은지 어느덧 4개월. 저와 같은 시기에 시작한 많은 동료 중에서도 프로데뷔 첫 안타를 치신 분들이 많이 계시겠죠? 법률가의 호흡은 야구선수의 그것보다 훨씬 길기 때문에 기다리고 계신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제게도 얼마 전 평생 기억에 남을 첫 사건 승소가 있었습니다. 함께 나누어보면 좋을 것 같아 야구공을 챙기는 설레는 마음으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제주 강정마을에 파견 가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지만 저희 단체 구성원들은 번갈아 제주 강정마을에 머물렀습니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공권력의 침해를 감시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형사상 소송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 강정은 여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거리상으로도 심리적으로 먼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권의 눈으로도 강정은 가까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마구잡이식으로 체포하기. 체포적부심사청구를 법원에 내면 심사시간 다 되어서 내보내기. 그런데도 체포현장에서 적법하지 않은 체포라 다투면 법원가서 따지라며 한 귀로 흘리기.
제가 맡게 된 사건도 그런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제주해군기지 공사를 막기 위한 시위과정에서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일반교통방해 또는 집시법위반의 현행범으로 체포되면서 자동차들도 함께 압수되었습니다. 그런데 압수된 차량 중에는 주민들이 농번기에 사용하여야 하는 농사용차량도 있고, 심지어는 렌트된 차량도 있어 가환부할 필요가 충분하였습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은 수사의 필요성과 향후 형 집행시 몰수의 대상물이라는 이유로 가환부를 거부하였고, 저는 개정 형사소송법 제218조의 2에 따라 제주지방법원에 가환부를 신청하였습니다.
가환부 청구의 사유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렌트카에 대해서는 몰수할 대상이 아님이 명백하다. 그리고 제주도의 특성상 차량을 가지고 도서 밖으로 차를 반출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피압수자들이 모두 차량운행을 인정하고 있는데다가 피의사실의 특성상 압수차량에 대한 추가적 수사는 불필요하다(서귀포서에 가서 확인해보니 사건은 검찰에 송치되어 있는데도 차량은 보관송치가 되어 있더군요).
한 차례의 서면 공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렌트카에 대해서는 가환부를 인정하고 그 밖의 차량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일부인용판결입니다.
저를 믿어준 당사자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잠시 스쳐지나갔습니다. 누적 렌트비가 120만원이 넘었다는 분은 다행이라 여겼을 것이지만 다른 분께는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모두 이길 수도 있었을텐데. 조금 더 잘쓸걸. 내지 못한 서면이 있었는데 그 서면을 냈으면 어땠을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강정에 상주하고 있는 백신옥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가환부판결을 들은 마을분들께서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차량에 대해서도 다투어보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소송 한건의 승패가 한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까지 희망을 주기. 소송을 하되 소송에 매몰되지 않기. 법을 하지만 법에 묻히지 않기. 그 전화를 받으면서 수개월전 5명의 동료들과 함께 희망법의 창립을 고민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첫 안타를 치고 나서 야구공을 챙기는 야구선수의 모습과 함께.